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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형 단편

[김태형 빙의글] 흐림 바림 호림 "아, 내가 말 안 한 게 있는데. 우리 아직 만나." 간만에 마주하는 어색함을 살필 새도 없이 꽂는 말. 여주는 잠시 머리가 멍했다. 다짜고짜 찾아오는 것도 모자라, 우리가 아직 만나고 있다고? 뜬금없는 등장에 뜬금없는 말. 우리가 아직 만난다. 여주는 도저히 자신이 이해할 수 있는 말이 아니라고 생각해 되물었다. 뭐? “왜.” 되려 퉁명스러운 대답. 여주는 다시 물었다. “무슨 말이야?” “할머니가 우리 아직 만나는 줄 아신다고.” “왜?” “내가 그렇다고 했으니까.” “그러니까, 왜.” 여주는 확실한 이유와 결론을 원했다. 그러니까 대체 왜 우리가 아직까지 만나는 것으로 되어 있어야 하는 것인지. 결과적으로 그렇게 되어 있다면 그렇게 될 수 밖에 없는 그 대단한 이유는 무엇인지. 납득을 해야 했다... 더보기
[김태형 빙의글] 회색 매번 같은 이 자리. 한쪽에 쌓인 꽁초를 보며 검지를 툭툭 치면 힘없이 떨어지는 재. 근래 어지간히 힘들었나 싶었다. 버려진 담배들이 죄다 몽당연필같이 짧은 게. 태울 수 있을 때까지 태우다 버려진 꽁초들. 그렇게 흡입한 니코틴으로 고민이 다 해결되긴 했었나? 그럴 리 없겠지. 안에 쌓여서 몸만 죽어나는 거겠지. 태형이 속으로 자문자답했다. 유난히 탁한 공기가 모여 상종하고 싶지 않은 곳이었지만, 집에 있는 날이면 하루에 꼬박 열 번 발을 들이고 마는 태형이었다. 오늘이 일곱 번째. 아직 다섯 시 밖에 안 됐는데 벌써 일곱을 써버렸다. 잠에 들기까지 꽤 많은 시간이 남아 있는데. 나름 세어가는 재미가 있는 숫자였지만, 오늘은 그 선을 훌쩍 넘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틀 전도 그랬다만. 주머니에 넣.. 더보기
[김태형 빙의글] 팬지 (pansy) 맨발바닥이 바닥에 붙었다 떨어지며 쩍쩍 갈라지는 소리를 냈다. 여름 장마철이었다. 습기와 끕끕함을 가득 머금은 방 안에 초조하고 축축한 걸음이 쉴 새 없이 움직였다. 미처 다 마르지 않은 머리를 거칠게 뒤로 넘기면, 오른쪽 어깨에 아슬하게 걸쳐 있던 실크 가운이 아래로 흘러내린다. 흘러내린 가운을 따라 옮기는 시선에 담기는 붉은 선과 점들. 망가진 차림을 추스를 겨를은 없었다. 잘근잘근 손톱을 물어뜯는 전엔 없던 습관이 막 생길 참이었다. 5분도 채 되지 않은 사이 엄지 끝이 들쑥날쑥 갈려 있었다. 파고드는 아픔을 인식할 새도 없이 더욱 맹렬하게 움직이는 입과 달리, 부릅뜬 눈은 어느 한 곳도 응시하지 못했다. 비가 계속해서 창문을 때렸다. 거센 바람이 불어 불규칙한 소음을 만들다 바람이 잦아들면 다시 ..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