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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hort letter

[김태형 빙의글] 회색


매번 같은 이 자리. 한쪽에 쌓인 꽁초를 보며 검지를 툭툭 치면 힘없이 떨어지는 재. 근래 어지간히 힘들었나 싶었다. 버려진 담배들이 죄다 몽당연필같이 짧은 게. 태울 수 있을 때까지 태우다 버려진 꽁초들. 그렇게 흡입한 니코틴으로 고민이 다 해결되긴 했었나? 그럴 리 없겠지. 안에 쌓여서 몸만 죽어나는 거겠지. 태형이 속으로 자문자답했다.
유난히 탁한 공기가 모여 상종하고 싶지 않은 곳이었지만, 집에 있는 날이면 하루에 꼬박 열 번 발을 들이고 마는 태형이었다. 오늘이 일곱 번째. 아직 다섯 시 밖에 안 됐는데 벌써 일곱을 써버렸다. 잠에 들기까지 꽤 많은 시간이 남아 있는데. 나름 세어가는 재미가 있는 숫자였지만, 오늘은 그 선을 훌쩍 넘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틀 전도 그랬다만.
주머니에 넣어온 휴대폰을 꺼냈다. 이 시간만큼은 그저 멍하니 담배만을 태워왔지만, 오늘은 왠지 휴대폰이 필요했다. 어쩌면 이 시간 때문에 평소보다 더 베란다를 들락날락했는지도 모르겠고.
아무것도 실행시키지 않은 화면만 괜히 이쪽저쪽 넘기다 꽤 오랫동안 접속하지 않았던 인스타그램을 눌렀다. 그간의 긴 부재를 알리기라도 하는 듯 쌓여 있는 알람들. 개인적으로 와 있는 메시지들과 게시물에 달린 댓글, 좋아요 알람이었다.

'싸클 잘 들었어요'
'노래 너무 좋아요'
'형 이번 주 레슨 돼요?'
'왜 이렇게 연락이 안돼?'
'안녕하세요~'
'맞팔해요 (하트)'

간만에 보는 얼굴들, 일면식도 없는 사람들의 알람을 휙휙 넘기다 화면을 꺼버렸다. 휴대폰을 거실 소파에 던지고 다시 한 모금. 꽤나 긴 호흡을 거친 후에야 창 밖을 내다봤다. 창문 너머엔 바로 빌라 촌이 있었다. 왜 이렇게 가깝게 볼 수 있는 위치에 있는 걸까. 유난히 저 건물만 가까워 보였다. 아마 그놈의 재개발 기준만 잘 맞춰 아슬하게 만들어졌기 때문에 이런 건 아닐까. 태형은 요새 모든 물음에 부쩍 염세적인 답을 내놨다. 주변 사람들에게 긍정적이고 높은 의지력을 인정받던 자신의 모습은 어느새 옛말이 된 것 같았다. 의지로 해내던 기상도 쉽지 않았다. 자고 일어나도 어딘가 항상 몸이 뻐근하고, 피곤했다.

드르륵.

고요한 정적을 깨고 들리는 창문 여는 소리. 시선을 자연스레 조금 아래쪽으로 떨어뜨렸다. 검지와 중지 사이 아슬하게 걸려 있는 담배가 이내 태형의 입에서 깊게 호흡했다.
탁, 탁, 탁. 바로 맞은편 빌라의 누군가 창밖으로 옷을 세차게 털어댔다. 먼지가 앉을 새도 없이 탈탈. 하나 털고 또 털고. 안으로 들어갔다가 또 다른 옷을 들고 나와 털기를 반복했다. 그 소리에 맞춰 검지를 톡톡 치면 구석에 쌓인 꽁초 위로 죽은 재가 후두둑 떨어졌다.
5층 건물 5층에 사는 사람. 태형의 집은 7층이었다. 퍼지는 연기가 종종 시야를 막았지만, 가늘게 뜬 눈은 그 집 창문을 놓치지 않고 응시했다.
할 일이 끝났는지 이내 창 틀을 붙잡고 가만히 주변을 둘려본다. 이 가까움이 제멋대로 생각했던 재개발 기준 때문인지는 확신할 수 없었지만, 어쨌든 그 덕에 상대가 어떤 행동을 하는지 볼 수 있었다. 고개를 살짝 들어 이곳을 보면 어떤 표정을 짓는지도 알 수 있을 것 같은, 이상하도록 가까운 거리.
오른쪽 어깨의 삼분의 일이 드러나도록 늘어난 검정 티셔츠와 탁한 염색모 맨 위에 자리한 검정 뚜껑. 뿌리 염색을 할 때가 많이 지난 머리였다. 하긴, 뿌염이라는 건 여간 귀찮은 게 아니니까. 태형이 낯선 이의 사정을 십분 이해하며 한 모금 더 머금었다. 제 머리도 제때 염색을 하지 못해 검정 머리가 꽤나 많이 자라 있었다. 형형색색의 탈색모를 하지 않은 이후로 갈색의 머리를 지속해서 덮는 것도 귀찮아져 그냥 두던 참이었다. 제 몸을 가꾸고 꾸미는 것에 큰 재미를 느끼던 태형이었지만, 어느 순간 그런 것도 의미가 없어져 거울 속 제 모습을 애써 외면하며 살고 있었다.
이윽고 5층 창가에 한 명이 더 나오고 입술에 가까워지던 담배가 이내 태형의 얼굴 근처에서 멈췄다. 홀로 서서히 타들어가는 담배만큼 느리게 흐르는 순간. 진하게 얽히는 저 남자 둘과 태형의 심장 빼고는 주변 모든 것이 멈춘 듯했다.



멀리 익숙해져 버린 버스 번호가 보였다. 가까이 다가올수록 목구멍 아래로 밀어 삼키는 한숨도 커져갔다. 이내 같은 곳을 보며 서 있던 사람들 중 일부가 함께 버스에 올라타고, 태형은 버스 손잡이를 잡고 섰다. 몸이 피곤했지만, 이른 아침부터 눈치 보며 꾸역꾸역 앉을 바엔 서서 가는 게 좀 더 낫다고 생각했다.
벌써부터 담배가 말렸다. 집을 나서기 전 이미 세 번의 카운트를 지웠는데. 괜히 슈트 안주머니에 자리한 담배갑을 만지작거렸다.
나를 죽이고 남의 기대에 부응하며 산다는 건 뭘까. 남? 회사 사람들이나 친구는 남이라고 할 수 있지만, 가족을 남이라고 할 수 있나. 그래도 이런 개인주의 시대에 나 빼곤 다 남 아니던가. 그렇다고 낳아준 부모에게 남이라고 하는 건 어떤 패륜같이 느껴졌다. 생각만으로도 죄책감이 온몸을 조여와 눈을 꼭 감고 생각을 지우려 애썼다.

'서른 중반 안에는 번듯한 사람이 되어 있어야지.'

결혼을 해야 했다. 그러니까 아직 스물 아홉의 젊은 나이였지만, 언젠가 할지 모를 결혼을 위해 앞으로 나아가야 했다. 그래서 직장에 출근해 돈을 벌고, 그래서 돈을 모아야 했다. 부모가 말하는 번듯한 사람이라는 건 그런 것 같았다. 은연중에 정해진 서른 중반이라는 숫자를 목표점으로 삼아 그 안에 주어진 퀘스트들을 모두 해결해내야 했다. 서른 중반, 혹은 그보다 더 빠른 나이 즈음이면 기대에 부응해 바로 결혼이라는 걸 할 수 있게.
눈을 꽉 감아도 생각은 멈추지 않았다. 제게 주어진 미션들은 시간이 갈수록 저를 더욱 짓눌러왔다. 당장에 베란다로 달려가 담배를 태우고 싶었다. 출근 전 열 개의 숫자를 모두 지워버렸어야 했다고 태형은 생각했다. 그럼 아침부터 이런 생각은 안 했을 수도 있을 텐데. 손잡이를 잡고 있는 손에 머리를 기대 매일 아침 하는 똑같은 생각을 또 반복하고 있었다. 생각에서라도 벗어나야 했다. 눈을 감은 채로 매일 하는 이런 생각들에 잠식되긴 싫었다.
추락하는 꿈이라도 꾼 듯 눈을 번쩍 뜨자 투 톤으로 갈라진 머리가 눈에 들어왔다. 앉아서 창 밖을 응시하는 뒤통수였다. 선명한 검정 머리는 자란 지 꽤 되어 보였고, 그 아래 그보다 조금 더 길게 자리한 탈색모가 있었다. 뿌리 염색이 필요해 보이는 머리였다. 주기적으로 하기 귀찮은 뿌리 염색. 그 아래 드러난 목을 따라 시선을 내리니 다 늘어나 오른쪽 어깨가 조금 드러난 검정 티셔츠가 눈에 들어왔다.
줄곧 창 밖을 향했던 얼굴이 별안간 고개를 돌려 태형이 있는 쪽을 바라봤다. 적당히 높은 작은 코와 잡티 하나 없어 보이는 피부. 그저 아무것도 없는 말랑한 얼굴. 갑작스레 보이는 얼굴에 태형은 저도 모르게 비스듬한 자세를 고쳐 똑바로 섰다. 가늘게 뜬 눈은 이내 출입문 쪽으로 눈을 돌리며 일어섰다.



"좋은 아침이에요."
"예. 좋은 아침입니다."

꾸벅 목례를 한 태형이 자리에 착석하자, 기다렸다는 듯이 한 직원이 다가와 물었다.

"모닝커피 한잔 하실래요?"
"괜찮습니다."

태형은 적당히 친절한 얼굴과 함께 책상 위에 놓인 캔커피를 가리키며 말했다. 언제부터 여기에 있었는지 기억도 안 나는 커피. 마실 생각도 없지만 늘 여기에 있어야 했다. 직원은 멋쩍은 듯 웃으며 제자리로 돌아갔다. 괜히 바쁜 척 분주하게 움직이던 손을 멈추니 한숨이 절로 나왔다. 사방을 둘러싼 사람들이 언제든 제게 말을 걸 수 있다는 사실이 목을 옥죄어왔다. 들어오기 전 한 대를 더 태웠지만, 벌써 다음 카운트를 세러 나가버리고 싶었다. 태형은 회사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이 성가셨다.



좋지 않은 컨디션과 기분이 자꾸만 술을 불렀다. 그 속도와 비례해 정신도 빠르게 몽롱해진 상태였다. 적당히 친절한 모습으로 모두에게 인사를 건넸지만, 꽤 많이 취한 상태였다. 태형은 가끔 이런 과음이 필요했다. 집에선 담배 이상의 것은 하지 않았다. 의도적으로 혼술도 하지 않았고 누구를 만나 술을 마셔도 맥주 한 잔을 넘기지 않았다. 굳이 그렇게 살 필요는 없었지만, 제 스스로 정해둔 어떤 룰 같은 것이었다. 그 룰은 '번듯한' 삶을 살아가기 위해 지켜야 하는 선이었다. 목표를 계속 상기하며 살아갈 수 있게 하는 원동력이자, 낙인처럼 새겨두어 과거나 꿈은 다시 상기할 가치가 없다는 생각에 강한 힘을 실어주는 지도자. 내 모든 것을 망치는. 그런 것이었다.
두통에 고개를 뒤로 젖혔다. 간만에 세상이 돌 것 같은 느낌에 옆에 서 있던 전봇대에 기대어 눈을 감았다. 잠시 멈춰서 쉬어도 도움되는 것은 하나 없었다. 제대로 된 것 하나 없는 이 세상에서, 제 맘대로 되는 것은 정말 단 하나도 없었다.
회식에서 술에 절어 귀가하는 사람들은 늘 이런 식이었으려나 싶었다. 그래, 그런 사람들처럼 오늘은 이런 과음이 정말 필요했다.

"괜찮으세요?"

눈을 뜨자 늘 커피를 권하던 직원이 제 앞에 있었다.

"안녕하세요."

평소와 다르게 흐트러진 목소리로 건넨 인사에, 이내 팔을 잡고 바짝 붙어 선다. 태형은 뿌리쳐낼 힘도, 의지도 없었다.

"방금 전까지 같이 있어놓고 무슨 인사예요."

직원은 수줍게 웃었다. 듣기 좋은 피치의 웃음이었다. 회사에서는 이렇게 웃지 않았던 것 같은데. 어쩌면 매일같이 이런 웃음을 건넸지만, 제가 보지 않았던 것인지도 몰랐다. 늘 한결같이 똑같은 사람이었을지 모르는데. 저만 보고 있는 얼굴을 찬찬히 응시했다. 매력적인 얼굴이었다. 평소에도 그런 생각을 하지 않았던 건 아니었지만, 이건 매력이 있고 없고 와는 별개의 문제였다. 잘 될 수도 있지 않았을까? 이런 사람과. 어쩌면 일사천리로 내 퀘스트를 깰 수 있게 해 줄지도 모를. 그 '번듯한' 인생에 나를 초스피드로 데려다 줄.
막아 두었던 생각이 방향을 잃고 번져나가는 건 삽시간이었다. 제 룰을 부수는 행동 하나 했기로서니 생각이고 행동이고 맘처럼 되지 않았다. 평소보다 덜 멀쩡한 정신이 마음속에서 쉽게 화를 불러왔다. 그저 딱 하루만 술의 도움을 좀 받고 싶었던 것뿐인데. 조금만 벗어나는 행동을 하면 곧장 성가신 일이 따라왔다. 태형은 성가신 일이 싫었다. 현 상황에서 조금이라도 벗어날 수 있는 여지를 주는 것들은 모두 멀리하고 싶었다. 저의 현실을 조금이라도 더 깨닫게 하는 것들은 가까이하고 싶지 않았다. 그런데 현 상황이 뭘까. 내 현실이 뭐지.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하는 것인지, 누군가 정해준 퀘스트를 타파해가며 사는 것인지 구분이 되지 않았다. 분명 명확하게 선을 긋고 가둬 놓았던 것들인데. 지금은 그 경계가 모두 뭉개져 무슨 일이라도 일어날 것만 같았다.

"조심히 가세요."

목 인사를 건넨 뒤 전봇대에서 비틀비틀 벗어나기 시작했다. 잡고 있는 끈이 더 희미해지기 전에 집에 가야 했다. 울분을 토하든, 구토를 하든, 씻지도 않은 채로 잠들든. 뭐든 집에서 해야 했다.
한 잔 더 하고 가세요. 조심스러운 말과 함께 태형의 옷 끝을 살짝 당긴다. 가던 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았다. 다시 눈이 마주치자 쑥스러운 얼굴은 바닥을 향했다. 태형이 가슴팍에 들어 있던 담뱃갑을 꺼내 흔들었다. 딱 한 개비가 있었다. 라이터로 불을 붙여 한 모금 깊게 머금었다. 둘 사이를 메운 담배 연기에 이내 시야가 흐려졌다.



부드러웠다. 맞추는 입이 성급하지 않았고 기대에 부응하지 못할 정도로 더디지도 않았다. 태형 또한 행동에 망설임이 없었다.
아무 생각도 하고 싶지 않았다. 그저 아무 생각 없이 자신이 아닌 자신의 시간을 보내고 싶었다. 이게 큰 혼란스러움 없이 이뤄지는 일이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늘 이런 식으로 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더는 생각하고 싶지 않아 더 깊이 입 맞추면 상대의 입에서 옅은 숨소리가 터졌다.
눈을 뜨자 언제 켰는지도 모르는 어두운 조명이 주변을 비추고 있었다.

"왜 그래요."

가쁜 숨이 아직 가지 않은 목소리가 속삭였다. 지금까지 꾹 참으며 쌓아온 것들이 한순간에 무너지기 직전이었다. 함께 엉켜 있던 몸을 풀러 낸 태형이 이내 몸을 일으켰다.

"어디 불편해요?"

미안해요. 급하게 셔츠 단추를 채우며 말했다. 둘 사이에 침묵이 흘렀다. 단추가 어긋나 제대로 채워지지 않았지만 고쳐 잠글 수 없었다. 이대로 계속 이 침묵 속에 있다간 무슨 말이든 해버릴 것 같았다. 일 년 전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했던 말이 목 끝까지 차올라 태형을 괴롭혔다. 딱 하루만이라도 술에 의지해보자고 생각했던 건 역시 잘못된 일이었다고 스스로를 자책했다. 자책하면 제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그래야 이 순간을 얼른 지나칠 수 있을 것 같았다.

"진실된 마음으로 여기 온 거 아니에요. 미안해요. 정말 미안해요."
"...."

태형이 황급히 호텔방을 나섰다.
도망치듯 호텔을 빠져나와 얼마간은 달리고, 또 얼마간은 숨을 헐떡이며 걸었다. 택시는 타고 싶지 않았다. 이 상태로 누군가를 마주했다간 없는 얘기까지 털어놓을 것만 같았다. 어디를 향해 걷고 있는 걸까. 아무리 멀리까지 왔다고 해도 거기서 거기일 터였다. 집과 회사가 멀지 않다는 사실조차 태형은 괴로웠다.
편의점엔 들리지 않았다. 당장에 보이는 곳으로 달려가 담배를 사는 것이 제일 먼저 하고 싶은 일이었지만, 그러지 않았다. 어느새 아파트 정문이 눈앞에 있었고 늘 그랬듯 방향을 돌려 뒷문으로 향했다. 그리고는 아파트 담장으로 둘러싸여 어두운 길을 천천히 걸었다.
베란다에 나서면 보이는 그 골목. 걸음을 멈추고 전봇대에 머리를 박고 섰다. 담배. 담배를 태우고 싶었다. 술을 더 먹거나. 애초에 만취할 만큼 마신 게 잘못된 선택이었다. 아니, 인사불성이 될 정도로 들이부었다면 아까의 그 실수도 저지르지 않았을지 모른다. 곧장 터질 듯 머리와 입을 맴도는 이 생각들도 안 했을지 모르고. 태형의 예전 술버릇은 자는 것이었으니까 어쩌면 그대로 잠이 들어 누군가 택시를 태워 짐짝처럼 집으로 보내졌을지 모른다.
태형은 자꾸만 현재가 아닌 다른 경우의 수를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이러다 현실을 까먹을 수 있다면 좋을 텐데. 다른 상황을 생각하는 만큼 현실이 좋아진다면 더할 나위 없겠다고 생각했다. 아니면 망할 이 생각들이 사라지든가. 아무거나 하나라도. 하지만 정작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드르륵. 고요한 골목의 정적을 깨는 소리였다. 전봇대에 박았던 머리를 떼고 그곳으로 고개를 들었다. 소리가 난 곳이 어딘지는 몰랐다. 그저 무의식에 따라 눈이 어딘가를 향했다.
저 위에서 누군가 고개를 내밀었다. 성별도 가늠할 수 없고, 얼굴도 보이지 않았다. 그저 까만 콩 같은 실루엣 하나만 보였다. 태형은 그 고개의 방향이 필시 저를 향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이 또한 알코올에 의한 지배의 결과겠지. 실루엣은 움직임이 없었다. 태형은 주변 가로등 빛을 손으로 애써 차단하며 말했다.

"담배 한 개만요."

힘없는 목소리가 고요한 골목을 울렸다. 까만 실루엣은 여전히 움직이지 않았다.

"라이터는 있는데 담배가 없어요."

취기 가득한 목소리가 이번엔 조금 더 크게 골목에 울렸다. 드르륵. 밤하늘보다 훨씬 진했던 까만 실루엣이 어느새 사라졌다. 집을 바로 앞에 두고 허공에 담배 구걸이나 해대는 꼴이 우스웠다. 병신 같고 처량하지. 녹록지 않은 현실도 아닌데 늘 누구보다 가난한 기분이었다. 차라리 실제로 가난했다면 이렇게 불행하진 않았을 것 같았다. 차라리 어떻게 해서든 해결할 수 있는 다른 문제들이었다면. 그 좋아하던 탈색모와 옷도, 불가능이란 제 사전에 없는 것처럼 굴던 그 의지도 모두 그대로 갖고 있었을 것 같은데. 이런 회색 인간이 되진 않았을 것 같은데. 또다시 전봇대에 머리를 박으면 줄곧 깨물고 있던 입술이 터져 피가 맺힌다. 아프다. 귀신같은 눈물이 태형도 모르게 맺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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