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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탄 빙의글

[전정국 빙의글] 엘리베이터 안에서 1시가 넘은 시간. 정국이 검정 봉지를 달랑거리며 엘리베이터를 기다렸다. 아직 많이 쌀쌀한 새벽 공기. 후드 모자를 뒤집어쓴 채 깜빡이지 않는 눈으로 엘베 시그널을 좇았다. 복도엔 슬리퍼 끝으로 바닥을 콕콕 찌르는 소리와 비닐봉지 부스럭대는 소리만 짧게 울렸다. 이상하리만치 말똥한 새벽. 유난히 조용한 밤. B3, B2, B1, 1. 맑은소리와 함께 엘리베이터 문이 정국의 코앞을 스치며 열렸다. 금방이라도 빨려 들어갈 것처럼 문앞에 바짝 서 있던 정국은 그대로 멈춰 설 수밖에 없었다. 한쪽 발은 올렸지만, 차마 몸까지 실을 수가 없어서. 정적. 그리고 그 정적을 덮는 적나라한 소리. 다른 사람이 타든 말든 개뿔도 상관없어 보였다. 문이 열리기 전부터 불타오른 것 같은 스킨십. 남자는 여자의 턱 아랫목에 .. 더보기
[김태형 빙의글] 흐림 바림 호림 "아, 내가 말 안 한 게 있는데. 우리 아직 만나." 간만에 마주하는 어색함을 살필 새도 없이 꽂는 말. 여주는 잠시 머리가 멍했다. 다짜고짜 찾아오는 것도 모자라, 우리가 아직 만나고 있다고? 뜬금없는 등장에 뜬금없는 말. 우리가 아직 만난다. 여주는 도저히 자신이 이해할 수 있는 말이 아니라고 생각해 되물었다. 뭐? “왜.” 되려 퉁명스러운 대답. 여주는 다시 물었다. “무슨 말이야?” “할머니가 우리 아직 만나는 줄 아신다고.” “왜?” “내가 그렇다고 했으니까.” “그러니까, 왜.” 여주는 확실한 이유와 결론을 원했다. 그러니까 대체 왜 우리가 아직까지 만나는 것으로 되어 있어야 하는 것인지. 결과적으로 그렇게 되어 있다면 그렇게 될 수 밖에 없는 그 대단한 이유는 무엇인지. 납득을 해야 했다... 더보기
[민윤기 빙의글] same but different 이런 곳에서 만나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는데. 얼굴을 다시금 뜯어 봐도 분명 그였다. 혹시라도 닮은 사람일까 싶어 눈을 꼭 감았다 뜨는 사이, 뒷사람의 재촉에 안으로 밀려 들어와버린다. 잔걸음으로 가까이 다가서는 지금까지도 시선이 맞는 걸 보니 확실히 민윤기가 맞는데. 마주친 장소가 의외여서 그런지 사고가 잠시 고장난 듯 했다. 민윤기가, 클럽에 있다. 왠지 상극의 두 단어처럼 느껴졌다. 적어도 나를 만난 당시에는 상극이었는데. 안 본 새 생활 패턴이 바뀐 걸까. 주아는 그 찰나에 여러 생각을 늘어놓고 있었다. "어서오세요. 반갑습니다." 본인임을 확인시켜주기라도 하는 익숙한 목소리가 들리고. 슬쩍 웃기까지 하는 얼굴. 이내 살짝 감은 눈으로 얼굴을 미세하게 젓는다. 지금은 모른척 하자는 무언의 신호였다... 더보기
[전정국 민윤기 빙의글] Life walks towards me 들려오는 바람 소리와 자동차의 쉴 새 없는 움직임이 자꾸만 정국의 몸을 때렸다. 시선을 먼 아래로 내리면 보이는 건 온통 거먼 물. 저곳에 삼켜질 거라는 생각은 수천 번을 반복해도 익숙해지지 않았다. 언젠가 해 본 경험에 의해 생긴 트라우마라도 되는 듯, 생각할 때마다 결국엔 몸서리를 치고 만다. 분명 그토록 갈망하던 일인데. 막상 마주하니 어떻게 하고 싶은 것인지 결정을 내릴 수 없었다. 외면하고 싶은 건지, 직면하고 싶은 건지. "안 뛰어요?" 누군가 물었다. 소음을 뚫고 들려온 목소리는 바로 옆에 있는 것 같은 착각이 들게 했다. 돌아보면 마치 처음부터 그곳에 있던 듯 여유 있게 벽에 몸을 기대고 서 있는 한 남자. 어두운 공간에서도 한 눈에 보일 만큼 하얀. "아까부터 그러고 있길래." 지금의 저.. 더보기
[진 빙의글] 혼(婚) "하지 마세요, 이 결혼." 둘만 남게 된 작은 방 안에 정적이 흘렀다. 석진이 조용히 침을 삼켰다. 대체 뭘 어쩌자고 저런 말을 뱉었나 싶었지만, 한편으론 꼭 필요한 말이었다는 걸 무의식 중에 알고 있던 것 같았다. 여자는 대답이 없었다. 그저 감정 없는 얼굴로 석진을 바라보기만 할 뿐이었다. 서로 빤히 맞는 눈. 당연히 오지랖 넘치는 말이었다. 가까운 사람이었어도 쉽게 할 수 없을 말을, 오늘 처음 보는 사람에게 듣는 심정은 어땠을까. 단정하고 과묵해 보이는 겉모습과 달리, 석진의 마음은 초단위로 변하고 있었다.물론 이런 직업을 가졌다고 해서 제가 맡는 고객의 모든 것을 알 순 없었다. 조금 더 간단하게 말하면, 맡은 커플들이 결혼에 골인하고 저는 정산을 받으면 끝인 일이었다. 부수적인 것들은 모두 .. 더보기
[전정국 수위글] 처음 (비밀번호 1111) 보호되어 있는 글입니다. 더보기
[전정국 빙의글] 사라지지 않는 밤 둘의 행동이 성급했다. 타이밍이 엉켜 서로의 얼굴을 붙잡는 손이 동시에 부딪혔고, 이에 입술을 몇 번이나 박은 탓에 정국의 입술엔 터지지 않은 피가 작게 고여 있었다. 제자리에 놓여 깔끔하게 정돈되어 있는 사물들과 달리, 방에서 흐트러져 있는 것은 오로지 둘 뿐이었다.그토록 갈망하던 순간. 이 순간을 위해 한없이 갉히고 다쳤을 마음은 눈 녹듯이 사라져 있었다. 그저 얼굴과 몸이 가는 대로. 그렇게 얽히고설켜 방향감을 잃고 침대 아래로 떨어지면, 상황과 상관없는 신음이 입에서 터지곤 했다. 그마저도 하나의 배경음이 되어 버린 순간들을, 후회로 돌이키고 있을까. 시작이랄 것도 없이 눈 깜짝할 새 거기까지 닿아버린 자신들을 절망 속에서 자책해왔을까. 명을 다 한 것 같은 푸르스름한 불만 켜져 있는 비상구. 문.. 더보기
[김태형 빙의글] 회색 매번 같은 이 자리. 한쪽에 쌓인 꽁초를 보며 검지를 툭툭 치면 힘없이 떨어지는 재. 근래 어지간히 힘들었나 싶었다. 버려진 담배들이 죄다 몽당연필같이 짧은 게. 태울 수 있을 때까지 태우다 버려진 꽁초들. 그렇게 흡입한 니코틴으로 고민이 다 해결되긴 했었나? 그럴 리 없겠지. 안에 쌓여서 몸만 죽어나는 거겠지. 태형이 속으로 자문자답했다. 유난히 탁한 공기가 모여 상종하고 싶지 않은 곳이었지만, 집에 있는 날이면 하루에 꼬박 열 번 발을 들이고 마는 태형이었다. 오늘이 일곱 번째. 아직 다섯 시 밖에 안 됐는데 벌써 일곱을 써버렸다. 잠에 들기까지 꽤 많은 시간이 남아 있는데. 나름 세어가는 재미가 있는 숫자였지만, 오늘은 그 선을 훌쩍 넘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틀 전도 그랬다만. 주머니에 넣.. 더보기
[전정국 빙의글] Own it "안 해요." 시끄럽게 울리는 음악 소리를 뚫고 들려오는 단호한 목소리. 정국은 뱉어진 단 두 글자와 내비치는 표정으로 이 사람을 완벽하게 파악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 상황이 아니어도 제 스스로 타인을 판단하고 드는 데는 도가 튼 상태라 여기며 살고 있었고, 지금은 한층 강한 확신이 마음을 들뜨게 만들고 있었다. 여자는 지금 보이는 저 모습이 실제 모습일 확률이 다분했다. 겉으로 내비치는 행동이 현재 자신의 마음 상태와 일치할 확률 또한 높았고. 눈 하나 깜짝 않고 그 모습을 그대로 주시하는데, 여자 또한 지지 않고 눈을 맞추고 나선다. 현재는 서로를 가소롭게 생각하고 있을지 모를 일이었다. 정국은 이런 식의 단호한 모습에 당황을 타거나 할 성격이 아닌지라 한 발 더 몸을 밀착하고 나섰다. .. 더보기
[민윤기 빙의글] 나는 왜 사랑하지 않는 건데요 진정되지 않는 마음은 언제부터 시작됐을까. 한 달 전? 일 년 전? 그때부터? 어쩌면 처음부터. 하지만 처음은 어디일까. 그 시작점을 알 수 있다면 스스로 끝을 내기가 조금은 더 쉬웠을까. 어쩌면 지금보다 더 힘들었으려나. 윤기는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매번 같은 생각을 했다. 어떻게 해서든 실마리를 찾으려 고군분투해도 다시 빼곡하게 들어차는 생각들. 어떻게 해야 하는 건지 결론은 나지 않았다. 나는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 이 관계 안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게 있긴 한가. 처음부터 지금까지, 아무도 답해주지 않았다. 방 안에는 수건으로 머리를 터는 둔탁한 소리만 들렸다. 어깨에 닿지도 않을 만큼 짧은 머리. 그 끝에 맺혀 있던 물방울은 사방으로 튀었고, 윤기의 앞머리에 맺혀 있던 물방울은 얼굴을 타고 흘..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