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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정국 빙의글

[전정국 빙의글] 엘리베이터 안에서 1시가 넘은 시간. 정국이 검정 봉지를 달랑거리며 엘리베이터를 기다렸다. 아직 많이 쌀쌀한 새벽 공기. 후드 모자를 뒤집어쓴 채 깜빡이지 않는 눈으로 엘베 시그널을 좇았다. 복도엔 슬리퍼 끝으로 바닥을 콕콕 찌르는 소리와 비닐봉지 부스럭대는 소리만 짧게 울렸다. 이상하리만치 말똥한 새벽. 유난히 조용한 밤. B3, B2, B1, 1. 맑은소리와 함께 엘리베이터 문이 정국의 코앞을 스치며 열렸다. 금방이라도 빨려 들어갈 것처럼 문앞에 바짝 서 있던 정국은 그대로 멈춰 설 수밖에 없었다. 한쪽 발은 올렸지만, 차마 몸까지 실을 수가 없어서. 정적. 그리고 그 정적을 덮는 적나라한 소리. 다른 사람이 타든 말든 개뿔도 상관없어 보였다. 문이 열리기 전부터 불타오른 것 같은 스킨십. 남자는 여자의 턱 아랫목에 .. 더보기
[전정국 민윤기 빙의글] Life walks towards me 들려오는 바람 소리와 자동차의 쉴 새 없는 움직임이 자꾸만 정국의 몸을 때렸다. 시선을 먼 아래로 내리면 보이는 건 온통 거먼 물. 저곳에 삼켜질 거라는 생각은 수천 번을 반복해도 익숙해지지 않았다. 언젠가 해 본 경험에 의해 생긴 트라우마라도 되는 듯, 생각할 때마다 결국엔 몸서리를 치고 만다. 분명 그토록 갈망하던 일인데. 막상 마주하니 어떻게 하고 싶은 것인지 결정을 내릴 수 없었다. 외면하고 싶은 건지, 직면하고 싶은 건지. "안 뛰어요?" 누군가 물었다. 소음을 뚫고 들려온 목소리는 바로 옆에 있는 것 같은 착각이 들게 했다. 돌아보면 마치 처음부터 그곳에 있던 듯 여유 있게 벽에 몸을 기대고 서 있는 한 남자. 어두운 공간에서도 한 눈에 보일 만큼 하얀. "아까부터 그러고 있길래." 지금의 저.. 더보기
[전정국 빙의글] 사라지지 않는 밤 둘의 행동이 성급했다. 타이밍이 엉켜 서로의 얼굴을 붙잡는 손이 동시에 부딪혔고, 이에 입술을 몇 번이나 박은 탓에 정국의 입술엔 터지지 않은 피가 작게 고여 있었다. 제자리에 놓여 깔끔하게 정돈되어 있는 사물들과 달리, 방에서 흐트러져 있는 것은 오로지 둘 뿐이었다.그토록 갈망하던 순간. 이 순간을 위해 한없이 갉히고 다쳤을 마음은 눈 녹듯이 사라져 있었다. 그저 얼굴과 몸이 가는 대로. 그렇게 얽히고설켜 방향감을 잃고 침대 아래로 떨어지면, 상황과 상관없는 신음이 입에서 터지곤 했다. 그마저도 하나의 배경음이 되어 버린 순간들을, 후회로 돌이키고 있을까. 시작이랄 것도 없이 눈 깜짝할 새 거기까지 닿아버린 자신들을 절망 속에서 자책해왔을까. 명을 다 한 것 같은 푸르스름한 불만 켜져 있는 비상구. 문.. 더보기
[전정국 빙의글] Own it "안 해요." 시끄럽게 울리는 음악 소리를 뚫고 들려오는 단호한 목소리. 정국은 뱉어진 단 두 글자와 내비치는 표정으로 이 사람을 완벽하게 파악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 상황이 아니어도 제 스스로 타인을 판단하고 드는 데는 도가 튼 상태라 여기며 살고 있었고, 지금은 한층 강한 확신이 마음을 들뜨게 만들고 있었다. 여자는 지금 보이는 저 모습이 실제 모습일 확률이 다분했다. 겉으로 내비치는 행동이 현재 자신의 마음 상태와 일치할 확률 또한 높았고. 눈 하나 깜짝 않고 그 모습을 그대로 주시하는데, 여자 또한 지지 않고 눈을 맞추고 나선다. 현재는 서로를 가소롭게 생각하고 있을지 모를 일이었다. 정국은 이런 식의 단호한 모습에 당황을 타거나 할 성격이 아닌지라 한 발 더 몸을 밀착하고 나섰다. .. 더보기
[전정국 빙의글] 당신의 절망을 바라는 나에게 "우리 어차피 계속 못 만날 거잖아" 그 말은 정국에게 꽤나 큰 충격을 가져다줬다. 순간 숨 쉬는 것도 잊게 할 만큼. 사방이 단단한 쇠로 막힌 깜깜한 방에 갇혀 사정없이 머리를 부딪히는 느낌이었다. 이론적인 고통은 극심한데 정신은 오롯이 다른 곳에 있어 아픔조차 인식할 수 없는 그런 느낌 같았다.젓가락질이 멈추고 오물거리던 입도 일순간 얼어붙는다. "무슨 말이에요?""그렇잖아." 놓았다, 가 정국이 받은 느낌이었다. 자신과 관련된 모든 걸 저 한마디로 놓은 것 같다고. 그리고 이어지는 말은 없었다. 그렇잖아, 가 끝이었다. 그게 그녀가 우리를 놓는 방식이라는 생각이 머리부터 발끝까지 스며들어 심사를 뒤틀리게 만들었다.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고삐가 풀리는 모습을 보이고 싶진 않았지만, 그렇다고 이대로 .. 더보기
[전정국 빙의글] 곧게 삐뚤어진 사이 입을 동그랗게 말고 기분 나쁜 연기를 연신 뿜어낸다. 삽시간에 정국의 얼굴을 덮친 연기는 서서히 떠오르다 이내 처음부터 없었던 듯 사라지기를 반복했다. 눈 하나 깜짝 않고 정국을 주시하다 이내 말한다. “넌 내가 왜 좋니.” 꼰 다리가 네모난 테이블 영역 밖으로 벗어나 있었다. 몸을 곧게 세우고 앉아 있는 정국과 달리 한껏 비뚤어진 그녀의 자세는, 둘의 미래를 말해주는 작은 복선 같이 느껴졌다. 함께 있는 이 짧은 순간에도 결코 섞일 수 없다는 듯한. 정국을 서서히 찌르고 죽이는 그런 아주 작고 사소한 것들. 정국은 그것들을 버텨내고 있었다. 아무 말없이.그녀는 정국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굳이 말을 하지 않아도 그의 눈은 늘 많은 말을 했으니까. 그녀는 그런 그의 마음을 단박에 읽어낼..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