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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hort letter

[김태형 빙의글] 팬지 (pansy)


맨발바닥이 바닥에 붙었다 떨어지며 쩍쩍 갈라지는 소리를 냈다. 여름 장마철이었다. 습기와 끕끕함을 가득 머금은 방 안에 초조하고 축축한 걸음이 쉴 새 없이 움직였다. 미처 다 마르지 않은 머리를 거칠게 뒤로 넘기면, 오른쪽 어깨에 아슬하게 걸쳐 있던 실크 가운이 아래로 흘러내린다. 흘러내린 가운을 따라 옮기는 시선에 담기는 붉은 선과 점들. 망가진 차림을 추스를 겨를은 없었다. 잘근잘근 손톱을 물어뜯는 전엔 없던 습관이 막 생길 참이었다. 5분도 채 되지 않은 사이 엄지 끝이 들쑥날쑥 갈려 있었다. 파고드는 아픔을 인식할 새도 없이 더욱 맹렬하게 움직이는 입과 달리, 부릅뜬 눈은 어느 한 곳도 응시하지 못했다.
비가 계속해서 창문을 때렸다. 거센 바람이 불어 불규칙한 소음을 만들다 바람이 잦아들면 다시 일정한 소리가 들려오길 반복했다. 가끔씩 찾아오는 바람이 없는 빗소리는 마치 시계 초침 소리 같았다. 그 소리를 듣고 있자면 꼭 얼마 남지 않은 시간이 금방이라도 온몸을 덮쳐버릴 것 같았다.
고요가 내려앉은 방 안. 둘 만 있고, 시간은 없었다. 한 사람은 말이 없고, 태형은 무슨 말이든 뱉을 수 있다. 태형은 방안을 거닐지만, 그는 그럴 수 없다. 금방이라도 현기증에 쓰러질 것만 같아 떨리는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붉게 물든 시트 자국은 끝을 모르고 번지고 있었다. 한가로이 이동하는 구름처럼 세력을 천천히 넓혀갔다. 보고 있자니 방 안의 조명도 전부 붉게 물드는 것 같았다. 하얀 침대 위에 누워 하얀 시트를 덮고 있는 그. 시트는 그를 전부 가리고 있어서, 어떤 자세와 표정으로 멈춰버렸는지 알 수 없었다. 그저 볼 수 있는 것은 무미건조한 호텔방 내부와 시트를 물들이는 움직임, 그 위로 드러나는 모양과 옆에 가지런히 놓인 과도뿐이었다.
덮쳐 가는 그 피는 마치 지도 같기도, 다분한 의도를 갖고 그려낸 미술작품 같기도 했다. 활짝 피워낸 팬지. 꽃 같았다. 선명하게 핀 빨간 꽃. 중앙부부터 진하게 번져나가 빨갛게 물든 아름다운 팬지. 아름다운 꽃 같은 그의 피.
마침내 되찾은 초점과 함께 가운을 추스렀다. 덜 말라 축축한 머리를 말려야 했다. 그래야 세팅을 할 수 있으니까. 태형은 저벅저벅 화장실로 향해 꽂혀 있던 드라이기를 작동시켰다. 빗소리와 맨 발자국 소리 외엔 어떤 소음도 없던 방안에 삽시간에 소음이 덮쳤다. 다른 어떤 것으로도 쉽사리 덮을 수 없는 큰 소음. 저도 모르게 중얼거리는 소리 또한 금방 묻혀버린다.
태형은 자신이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거울을 통해 자신의 입을 똑바로 응시해도 들리지 않았다. 그저 누군가 아래턱을 붙잡고 흔들기라도 하는 것처럼 뻐금 뻐끔.
건조하게 마른 머리에 이름 모를 싸구려 젤을 치덕치덕 발랐다. 한 가닥도 흘러내리지 않도록 전부 넘겨 고정시켰다. 젤이 범벅된 머리가 조명에 반사돼 번들거렸다. 저 백 미터 근방에서 봐도 나인지 알 수 있도록. 피하기 위해 고개를 숙이는 것이 소용없도록. 그래야 했다.
처음과 같은 차림새로 돌아가기까지는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정갈한 회색 수트와 흠집 나지 않은 구두. 태형은 모든 것이 처음과 똑같았다. 힘주어 머리를 세팅한 것 빼고는 똑같았다, 나는.

"갈게."

마지막 인사를 뱉은 목소리가 괴상하게 갈라졌다.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어차피 들을 수 있는 것도 아니잖아.
태형은 그대로 호텔방을 나섰다. 잠시 서서 문이 잠기는 소리를 똑똑히 들은 뒤 주변을 살폈다. CCTV는 복도 맨 끝에 있었다. 천천히 그러나 망설이지 않는 발걸음이 어두운 복도 끝을 향했다.
열 걸음만 더. 다섯 걸음만, 두 걸음만. 이내 태형은 제 모습이 가장 잘 담길 수 있는 곳에 우두커니 멈춰서 몇 초간 렌즈를 응시한다. 눈에 두려움 따위는 더 이상 자리하고 있지 않았다. 그저 렌즈를 뚫어져라 쳐다볼 뿐이었다. 마치 제 얼굴을 렌즈 너머에 각인시키기라도 하는 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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