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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hort letter

[김태형 빙의글] 흐림 바림 호림

"아, 내가 말 안 한 게 있는데. 우리 아직 만나."

간만에 마주하는 어색함을 살필 새도 없이 꽂는 말. 여주는 잠시 머리가 멍했다. 다짜고짜 찾아오는 것도 모자라, 우리가 아직 만나고 있다고? 뜬금없는 등장에 뜬금없는 말. 우리가 아직 만난다. 여주는 도저히 자신이 이해할 수 있는 말이 아니라고 생각해 되물었다. 뭐?

“왜.”

되려 퉁명스러운 대답. 여주는 다시 물었다.

“무슨 말이야?”
“할머니가 우리 아직 만나는 줄 아신다고.”
“왜?”
“내가 그렇다고 했으니까.”
“그러니까, 왜.”

여주는 확실한 이유와 결론을 원했다. 그러니까 대체 왜 우리가 아직까지 만나는 것으로 되어 있어야 하는 것인지. 결과적으로 그렇게 되어 있다면 그렇게 될 수 밖에 없는 그 대단한 이유는 무엇인지. 납득을 해야 했다. 절대 그럴 수는 없을 것 같았지만.
늘 이렇게 불쑥 나타나 급작스러운 상황을 늘어놓는, 어찌할 수 없는 긴장감이 사라질 리 없는 관계인 거냐고 물었다. 그게 싫어 놓았던 관계는 끝나도 결국 이렇게 유지될 수 밖에 없는 거냐고. 여주는 태형에게 직접 묻는 대신 자신에게 질문을 했다.
태형은 전처럼 막힘없는 답을 하지 않았다. 돌아오는 말은 없었고, 얼굴은 나름 진중해 보이려는 참이었다. 시간의 흐름과 관계없이 익숙한 얼굴. 이내 느린 입을 열어 답을 한다.

“충격 받으실까 봐 그랬어.”
“…그래서 반년도 지난 일을.”

삼연속 ‘왜’라는 말로 드러낸 공격성은 이미 무너지고 없었다. 속에서 형용할 수 없는 무언가가 끓었지만, 자신이 화를 내지 않는 선택을 할 거라는 걸 여주는 이미 알고 있었다.

“할머니 충격받으면 안 되는 거 너도 알잖아. 그동안 별말 없으시길래 신경 안 쓰고 있었는데, 얼마 전에 네 얘기 하시더라. 헤어졌다고 솔직하게 말씀드린 뒤로 기력이 없어.”
“다른 사람 만난다고 하면 되잖아.”
“안 믿어. 거짓말하는 거 싫기도 하고.”
“부탁할 사람 정도는 있었을 거 아냐.”
“해봤는데 앞에서 자꾸 네 얘기 꺼내더라.”

더는 할 수 있는 말이 없었다. 불난집 불구경하듯 담담하게 말하는 모습을 보면 두말 없이 돌아서고 싶다가도, 할머님의 얼굴을 떠올리면 모든 게 모호해졌다.

"나도 해볼 수 있는 건 다 해봤어. 근데 안 되니까 어쩔 수 없이 너 찾아온 거고. 나라고 너랑 이렇게 서 있는 거 편할 줄 아냐."

그동안 정말 뾰족한 수가 없었겠다고 이해해버린 자신이 한심하게 느껴졌다. 내야하는 결론 또한 흐릿해졌다. 마지막 부탁이라 생각하고 들어주는 게 맞는 건지, 어차피 남이니 딱 잘라 싫다고 해야하는 건지.

"오늘만. 오늘만 같이 가줘."



정적만이 흘렀다. 속에서 일어났던 갈등의 결론은 태형의 부탁을 들어주는 것이었다.

“다시는 이런 일로 찾아오지 않았으면 좋겠어.”

고요를 깨고 뱉은 말에 태형은 그저 입꼬리를 올려 어깨를 들썩였다.
한 때 가장 가까운 사이였지만, 이제는 남보다 못한 사이. 반년 동안이나 서로에 대한 교류가 없었다. 잘 지내냐는 연락 한 번 주고 받은 적도 없고. 근황을 물어보기라도 해야하는 건가. 어쨌든 태형과 만나는 척하고 할머님을 뵙기로 했는데, 정작 김태형이 어떻게 변했는지는 아는 것이 하나도 없었다. 하던 일을 계속 하는지 정도는 알아야 하지 않을까. 얘기하다가 혼자 덜컥 말문이 막혀버리면. 다들 지금의 김태형을 얘기하고 있는데 나 혼자 예전의 김태형을 더듬어 얘기하고 있으면? 그러다 분위기가 이상해지면.
여주는 점점 초조해지는 마음에 무릎 위 올려 둔 가방 끈을 만지작거리기 시작했다. 티 나지 않게 곁눈질로 몇 번 힐끔거린 태형이 말했다.

“그대로니까 걱정 마.”
“어?”
“그대로라고. 다.”

순간적으로 밀려온 긴장감에 먹혀 이렇다할 말을 찾지 못해 침묵했다. 어쩌면 말을 더하는 것이 좋지 않을 거라는 철저한 판단에 의한 침묵.

“할머니가 좋아하겠네.”

태형이 전방에 시선을 둔 채 말했다. 여주는 그 말의 의미를 단박에 알 수 있었다. 아마 가방 옆쪽에 달린 작은 고리를 보고 한 말이겠지. 여주는 또 다른 침묵을 택했다.



긴장했던 것과 달리 만남은 짧고 별 탈이 없었다. 김태형의 거짓말을 할머님이 이미 알고 계셨다는 것을 제외하면.

‘네들 눈에는 이 늙은이가 바보로 보이나 부지?’
‘내가 아가 한 번 보고 싶어서 그런 거야. 태형이한테 너무 뭐라고 하지 말어라.’
‘그동안 만난다고 허풍 때리고 데리고 온 애들이 으찌나 마음에 안 들든지.’

“데려다 줄게.”
“됐어. 버스 타고 가면 돼.”

헤어지기 직전 서로를 마주 보고 서자 일순간 이상한 분위기가 흐르는 것 같았다. 말없이 보기만 하는 태형의 눈동자와 정확히 눈이 맞았다. 익숙하고도 낯선 그 기분에 갇혀 있고 싶지 않은 여주가 먼저 입을 열었다.

“뭐.”
“그 고리는 왜 아직까지 달고 다니는데.”
“할머님이 주신 거니까.”

태형은 다시 입을 닫았다. 고리를 아직까지 간직하고 있는 것에는 큰 의미가 있지 않았다. 그저 소중하다고 생각하는 물건이니 지니고 다니는 것 뿐이었다.

“내가 선물했던 것도 있잖아.”
“네가 준 걸 왜 아직까지 하고 다니겠어.”

여주의 대답에 태형은 눈썹을 까딱였다. 뭔가 마음에 들지 않을 때 하는 버릇. 여주는 최대한 태연한 표정을 짓기 위해 노력했다.

“만나는 사람 있어?”

예상치 못한 질문이었다. 저를 만나러 온 목적이 분명했기에 이렇게 사이를 모호하게 만드는 얘기 같은 건 하지 않을 거라는 생각 때문이었는지, 꽤나 당황스러웠다. 어쩌면 당황할 필요 없이 빈 껍데기뿐인 말일지 모르지만.

“진짜 내 연애 얘기가 듣고 싶어서 물어본 건 아니지?”

태형이 눈썹을 한 번 더 까딱였다.

“오늘은 할머님 생각해서 온 거니까 별다른 오해는 마.”
“하라 그래도 안한다.”
“잘 됐네. 갈게.”
“이여주.”

낮은 톤의 목소리가 거리에 울려 여주의 걸음을 잡아챘다. 잠시 들렸던 로퍼의 또각거림이 멎고 여주는 뒤 돌아보지 않은 채 멈춰섰다.

“고맙다, 오늘. 조심히 가.”

머리가 멍해지는 기분. 여주는 여전히 침묵을 유지한 채 다시 걸음을 재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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