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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hort letter

[민윤기 빙의글] 나는 왜 사랑하지 않는 건데요


진정되지 않는 마음은 언제부터 시작됐을까. 한 달 전? 일 년 전? 그때부터? 어쩌면 처음부터. 하지만 처음은 어디일까. 그 시작점을 알 수 있다면 스스로 끝을 내기가 조금은 더 쉬웠을까. 어쩌면 지금보다 더 힘들었으려나. 윤기는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매번 같은 생각을 했다. 어떻게 해서든 실마리를 찾으려 고군분투해도 다시 빼곡하게 들어차는 생각들. 어떻게 해야 하는 건지 결론은 나지 않았다. 나는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 이 관계 안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게 있긴 한가. 처음부터 지금까지, 아무도 답해주지 않았다.
방 안에는 수건으로 머리를 터는 둔탁한 소리만 들렸다. 어깨에 닿지도 않을 만큼 짧은 머리. 그 끝에 맺혀 있던 물방울은 사방으로 튀었고, 윤기의 앞머리에 맺혀 있던 물방울은 얼굴을 타고 흘렀다.
작고 작은 어깨에 걸쳐 있는 검정 언더웨이 끈. 뒤돌아 있는 그 모습은 영원히 저를 돌아봐주지 않을 것만 같았다. 앞으로도 볼 수 있는 건 뒷모습 뿐일 거라고.

"왜 이러는 건데요."

끝이 여기구나, 생각했다. 시작점은 알 수 없었지만, 적어도 끝은 알 수 있겠다고. 한 번도 입 밖으로 뱉어본 적 없는 말이었다. 이해할 수 없는 시점에 불쑥 찾아와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을 하더라도 받아들였다. 내게 대체 왜 이러느냐고 이유를 묻지도, 원망하지도, 미워하지도 않았다. 그런 것에 조금이라도 마음을 내는 것이 쓸모없다고 생각될 만큼, 지금도 나는 이 사람을 너무 원하고 사랑하니까.
적당한 대답이 돌아오기도 전에 떨궈지는 고개. 모든 것을 그대로 직시하고 직면하는 윤기였지만, 이 사람 앞에서는 그러지 못했다. 그게 무엇이든 고개를 떨구고, 이유를 묻지 않고, 모른 척 했다. 걷잡을 수 없이 부풀어버리는 마음에 먹혀 한참을 허우적대다 보면 금세 멀어져 있는 사람이라 몸을 가까이해도 닿을 수 없었고, 잡기 위해 감히 손을 뻗을 수조차 없었다.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벅차 어찌할 수 없는 사람. 그래서 늘 합리화하고 회피했다. 내 전부이지만, 내가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는 사람. 사랑하니까.

"사랑하니까."

저의 것과 꼭 같았지만, 같지 않았다. 나는 그 말을 하기 위해 들이쉬는 숨조차 괴로운데. 나는 그런데, 상대에겐 참 쉬웠다. 같은 글자 안에 담긴 의미의 크기는 너무도 달라서, 윤기에겐 그 말이 늘 전혀 다르게 들렸다. 일그러지고 부서진 말. 종착지는 자신이 아님을 너무 잘 알고 있었다. 그녀의 입을 떠나 어딘가에 멈춘 그 다섯 자는 윤기의 손끝에 닿지도 못한 채 어디론가 흘러갔다. 다른 누군가에게로.
입술을 꾹 깨물다 묻는다. 그럼 나는요.

"나는요."
 
애처로운 외침은 공중으로 흩어졌다. 마지막에서 외칠 수 있는 건 고작 이런 말 뿐이었다. 그럼 나는 왜 사랑하지 않는 건데요. 마음에서 뜨겁게 메아리쳤던 나머지 말들은 입가를 머물다 이내 부서졌다. 들리지 않았을 거라고 생각했다. 뱉어봐야 소용없는 말이었다. 상대에게 닿지 않고 다시 돌아와 할 수 있을 때까지 제 마음을 찢어발기는 말일 뿐인데. 그냥 삼켰어야 했다.
내가 손만 놓으면 금방이라도 끊어져버리는 관계. 의미를 찾는 건 의미 없었다. 그걸 찾기 시작하는 순간 어느새 끝나 있을 관계. 윤기는 더는 자신의 마음이 버텨주지 못하는 거라고 생각했다. 이런 의구심없이 어디까지 갈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던 걸까. 다 알면서 시작했지만, 어쩌면 처음부터 같은 마음 안에 있기를 바랐던 건 아닐까.
나는 왜 사랑하지 않는 건데요.
윤기를 몇 번이고 죽여온 그 말은, 마음 안에서 길을 잃고 헤매다 이내 조각나버린다. 이 무거운 마음을 얼마나 더 안고 더 갈 수는 있을까. 윤기는 답할 수 없었다.
잃을 새라 두눈 가득 담은 그녀의 입은 끝내 열리지 않는다. 너와 나 둘 중 아무도 답할 수 없는 관계. 앞머리에 맺혀 있던 물방울이 다시 얼굴을 타고 흐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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