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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hort letter

[전정국 빙의글] 사라지지 않는 밤

둘의 행동이 성급했다. 타이밍이 엉켜 서로의 얼굴을 붙잡는 손이 동시에 부딪혔고, 이에 입술을 몇 번이나 박은 탓에 정국의 입술엔 터지지 않은 피가 작게 고여 있었다. 제자리에 놓여 깔끔하게 정돈되어 있는 사물들과 달리, 방에서 흐트러져 있는 것은 오로지 둘 뿐이었다.

그토록 갈망하던 순간. 이 순간을 위해 한없이 갉히고 다쳤을 마음은 눈 녹듯이 사라져 있었다. 그저 얼굴과 몸이 가는 대로. 그렇게 얽히고설켜 방향감을 잃고 침대 아래로 떨어지면, 상황과 상관없는 신음이 입에서 터지곤 했다. 그마저도 하나의 배경음이 되어 버린 순간들을, 후회로 돌이키고 있을까. 시작이랄 것도 없이 눈 깜짝할 새 거기까지 닿아버린 자신들을 절망 속에서 자책해왔을까.

 

 

 

명을 다 한 것 같은 푸르스름한 불만 켜져 있는 비상구. 문 너머로 들려오는 사람들의 소리와 정국의 긴장된 숨소리가 번갈아 들렸다.

 

"아, 저."

 

말미를 완성하지 못한 채 뱉는 말은 조금 다급해 보였다. 수트 차림의 어른스런 겉모습과 달리 얼굴에는 초조함이 묻어 있었다. 바쁘게 하객을 맞이하고 있어야 할 신랑이 지금 제 앞에 있었다. 포멀한 머리 아래로 예쁘게 자리한 보타이. 꼭 맞는 검정 수트와 깔끔한 구두. 언젠가 옆에 두고 보고 싶었던 상상 속의 그 모습을 하고 있었다. 둘만 있는 비상구와 사람이 북적이는 홀 사이엔 고작 하나의 철문 밖에 없었기 때문에 누구든 이곳으로 들어올 수 있었고, 언제든지 이 모습을 보게 될 수 있었다. 누군가의 눈에 띄어도 딱히 이상해 보일만한 상황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가능한 한 깔끔하게 일을 덮으려던 두 사람이었다.

 

"떨리는구나."

 

목소리가 비상구에 작게 울렸다. 대답은 않고 하얀 장갑 낀 손으로 가슴께를 토닥이기를 여러 번. 그럼에도 나아진 기미가 없는지 정국의 미간이 살짝 구겨진다. 이내 똑바로 맞추는 눈.

 

"너 아무래도 긴장 많이 한 것 같은데."

 

긴장감에 압도되는 걸까. 여기서 자신이 뭘 해 줄 수 있을까. 등을 토닥여 응원을 건네주는 것도, 얼른 다시 자리로 돌아가 본분을 다 하라는 말도. 그 쉬운 것들조차 하지 못하는 자신이 사무치게 미워진다. 그저 눈을 맞추고 생각한다. 그냥 이렇게 있자. 내가 꿈꾸던 네 모습을 내 앞에 두고, 그냥 이렇게. 아무한테도 모습 보이지 말고, 둘만 있자. 다 관두고 함께 내일이 없는 것처럼 그렇게 살자. 여자는 뱉을 수 없는 많은 말들을 목 뒤로 삼켰다.

 

"떨리는 게 아니라."

"...."

"하기 싫어서 그래요."

 

정국이 보타이의 정갈한 모양을 길게 헝크러뜨리며 말했다. 언제든 제 마음을 숨기지 않고 표현했던 정국이었지만, 지금 같은 순간까지 한결같을 수 있는 그 용기가 부러웠다. 틀어막아둔 뭔가를 기꺼이 열어제껴서 더는 숨지 못하도록 만드는 그의 말. 저와는 달리 솔직할 수 있을 만큼 솔직한 사람. 내내 태연한 척하던 여자는 이내 흐느껴 울기 시작한다.

어떤 기억은 시간을 먹고 자란다. 간직하는 만큼 깊어지고 되려 선명해져 마음속에 각인되어버린다.

마음대로 되지 않는 인연에 애가 닳고, 맞지 않는 사이 틈을 어거지로 맞추려 애를 쓰고, 그래도 안돼서 모든 걸 놓으면 다시 언제 그랬냐는 듯 기회가 닿고. 그 기회를 잡으려 하면 도로 멀어지는 그런 관계. 닳고 지치고 지겹고 힘든 날의 연속에서 딱 그 하루. 그 하루는 얼마의 시간이 지나건 사라지지 않고 둘을 따라다녔다. 끝끝내 서로를 놓기로 한 순간도, 새로운 사람과 함께하는 날들도, 심지어 이럴 때조차.

 

'그날 일은 없었던 걸로 해요.'

 

"그날 일. 없던 척하고 속이면서까지 하고 싶지 않아요. 난 못하겠어요."

"...."

"하루 함께하게 되기까지 내가 어떤 마음을 가졌었는지, 무슨 마음으로 그 밤을 지워버리자고 했는지. 당신은 몰라요."

"...."

"하기 싫어요, 결혼."

"...."

"말해 봐요. 저 이대로 가요?”

"...."

"말해 줘요."

 

정국이 한 발 다가서며 말했다. 눈 한 번 깜박이지 않는 그의 얼굴은 간절해 보였다. 그 누구보다. 어쩌면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눈물만을 흘리고 있는 저보다 훨씬 간절할지 몰랐다. 끊임없이 마음을 때리는 질문들. 내가 과연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 그 어느 쪽도 후회하지 않을 자신이 없었다. 현실과 타협하는 것과 오로지 마음만을 따르는 것. 마음만을 따른들, 행복해질 거라고 자신할 수 없었다.

눈을 꼭 감고 생각했다.

 

'세상에 우리 둘만 남겨졌으면 좋겠어.'

 

그날 밤 귀에 속삭여주던 말. 그게 지금 이 순간 가장 하고 싶은 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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