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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hort letter

[전정국 빙의글] 당신의 절망을 바라는 나에게

 

"우리 어차피 계속 못 만날 거잖아"

 

그 말은 정국에게 꽤나 큰 충격을 가져다줬다. 순간 숨 쉬는 것도 잊게 할 만큼. 사방이 단단한 쇠로 막힌 깜깜한 방에 갇혀 사정없이 머리를 부딪히는 느낌이었다. 이론적인 고통은 극심한데 정신은 오롯이 다른 곳에 있어 아픔조차 인식할 수 없는 그런 느낌 같았다.

젓가락질이 멈추고 오물거리던 입도 일순간 얼어붙는다.

 

"무슨 말이에요?"

"그렇잖아."

 

놓았다, 가 정국이 받은 느낌이었다. 자신과 관련된 모든 걸 저 한마디로 놓은 것 같다고. 그리고 이어지는 말은 없었다. 그렇잖아, 가 끝이었다. 그게 그녀가 우리를 놓는 방식이라는 생각이 머리부터 발끝까지 스며들어 심사를 뒤틀리게 만들었다.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고삐가 풀리는 모습을 보이고 싶진 않았지만, 그렇다고 이대로 듣고만 있을 수는 없을 것 같았다.

그녀가 저와의 관계를 놓아버린다면. 나는.

 

"장난치지 마요."

"...장난 같아?"

"아, 헛소리 그만 해요."

"정국아."

 

진심이었다. 그녀의 부름에는 확신에 찬 느낌이 그대로 담겨 있었다. 영원히 알고 싶지 않았고, 느끼게 되지 않을 거라 여겼던. 둘 사이에는 없을 것만 같았던 그런 낯선 느낌이. 그건 낯설다고 일컬을 수도 없을 정도로 낯설어서, 듣는 순간 몸이 굳을 수 밖에 없었다. 몸이 굳어 움직일 수 없는 상태가 되면, 누군가 망치로 저의 몸을 세게 쳐야만 할 것 같은. 그렇게 몸이 다 으스러지고 난 뒤 조각이 된 몸을 해서야 사고 회로가 다시 돌아갈 것만 같은.

지금 내 앞에서 '멈춤'을 얘기하는 것이 정말 그녀가 맞는지 믿기지 않았다. 만에 하나 맞다면, 뱉은 그 말은 진심인지, 혹시나 숨긴 다른 뜻은 없는지 확실히 알아야 했다. 관련된 작은 것 하나하나를 모조리 다 확인하고 '진심'이라는 도장을 쾅 찍고 나서야 조금은 믿어질 것 같았다.

 

"이 얘기 하려고 오늘 집으로 불렀어요? 밥도 차려주고?"

 

손이 점점 떨려와 잡고 있던 젓가락을 내려놓으며 물었다. 답답함에 뒷머리를 만지작거리다 신경질적으로 팔을 내리면, 손가락에 엉켜 있던 머리칼이 손을 따라 앞쪽으로 움직인다. 이내 천천히 제자리를 찾고.

 

"아, 진짜."

 

정국이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마음처럼 흐트러져버린 자세. 꼭 숨이 가빠올 것만 같아 매지도 않은 넥타이를 잡아 뜯듯 목을 만지작거렸다. 정국은 어느새 목 주변이 붉어진 것도 모른 채 격양된 목소리로 물었다.

 

"지금 나한테 무슨 말 하는 건지 알긴 해요?"

"어."

"무슨 말인데요."

 

아, 진짜. 정국이 다시 한번 조급함을 담아 뱉었다. 그녀가 대답할 말이 뭔지 너무 잘 알아서, 가만히 있으면 듣고 싶지 않은 말을 듣게 될 것 같아서 저도 모르게 말을 가로채버린다. 순식간에 차오르는 눈물. 아니, 씨발. 이게 뭔데.

물론 두려워하고 있다는 건 알고 있었다. 그건 저도 마찬가지였으니까. 대다수의 사람이 곱게 봐주지 않는 이 관계 때문이겠지. 사랑하는 마음은 둘째 치고, 그 현실 자체를 여자는 진심으로 두려워했다. 집안 어른들의 압박이 계속 있었다는 것도, 그녀에게 '좋은 상대자'를 짝지어주려고 몇 번의 의도적인 만남이 있었다는 것도. 다 알았지만 신경 쓰지 않았다. 네가 그렇게 두렵다면 내가 대신 더 강인해질게. 정국은 늘 그랬다. 그런 것쯤은 걸림돌이 되지 않았다. 함께라는 전제하에 힘든 상황들을 견뎌낼 자신이 있었다. 그저 저의 손만 꼭 잡고 따라주면 되는 거였는데. 이제는 하지 못하겠다고 내 손을 놓아버리는 여자가 정국은 이해되지 않았다. 아니, 이해하고 싶지 않았다.

 

"하나만요."

"..."

"저 사랑하지 않아요?"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몇 번을 반복해서 물어도 여자는 대답하지 않을 것 같았다. 그녀에겐 우리가, 그저 차분하게 있다가 '그렇잖아'와 같은 무책임한 한마디를 던지고 끝내면 그만인 일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혼란스러운 저는 그대로 남겨두고.

 

"어떻게, 이렇게 한순간에 놔요."

 

실소와 함께 조용히 읊조린 한마디. 일순간 고요한 적막이 방을 메웠다. 여자는 여전히 말이 없었다.

시선을 아래로 떨구던 정국이 자리에서 일어난다.

 

"그게 그렇게 견디기 힘들 정도로 절망스러운 일이라면, 내가 만들어줄게요."

"...."

"어떻게 해서든 당신이 절망하게."

 

정국은 곧장 일어나 집을 나섰고, 여자는 정국이 떠난 뒤에도 자리에서 움직일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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