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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hort letter

[진 빙의글] 혼(婚)

"하지 마세요, 이 결혼."

둘만 남게 된 작은 방 안에 정적이 흘렀다. 석진이 조용히 침을 삼켰다. 대체 뭘 어쩌자고 저런 말을 뱉었나 싶었지만, 한편으론 꼭 필요한 말이었다는 걸 무의식 중에 알고 있던 것 같았다. 여자는 대답이 없었다. 그저 감정 없는 얼굴로 석진을 바라보기만 할 뿐이었다. 서로 빤히 맞는 눈. 당연히 오지랖 넘치는 말이었다. 가까운 사람이었어도 쉽게 할 수 없을 말을, 오늘 처음 보는 사람에게 듣는 심정은 어땠을까. 단정하고 과묵해 보이는 겉모습과 달리, 석진의 마음은 초단위로 변하고 있었다.

물론 이런 직업을 가졌다고 해서 제가 맡는 고객의 모든 것을 알 순 없었다. 조금 더 간단하게 말하면, 맡은 커플들이 결혼에 골인하고 저는 정산을 받으면 끝인 일이었다. 부수적인 것들은 모두 제하고. 플래너로서 그들의 상황과 위시에 맞는 것들을 찾아주고 제안하고. 무사히 결혼식을 마치면 다음 커플을, 그다음엔 또 다음 커플을. 비혼이다 뭐다 말이 많았지만, 남성이라는 약간의 특이성과 입소문 덕분에 찾아오는 고객은 끊이지 않았다. 하지만 가끔, 아주 가끔씩 죄책감이 느껴질 만큼 하던 일이 내키지 않을 때가 있었다. 바로 지금처럼.

 

"그럴까요."

 

여자는 허탈하게 웃으며 고개를 숙였다. 들릴 듯 말 듯한 그 대답에는 어떤 적의도 없었다. 모든 걸 체념한 채 방도없는 일에 소용없는 대응을 하듯, 그저 무기력한 대답. 차라리 저를 이상한 사람 취급하는 게 백 배는 나았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 대체 뭘 어쩌자고. 건드려서는 안 되는 부분을 톡 건드리니 그동안 쌓여있던 마음의 토사물이 와르르 삐져나오기 직전인 것처럼 느껴졌다. 본인이 애써 외면하고 덮어뒀을 것을 제가 친히 열어젖혀 확인시켜준. 어쩌면 이미 흘러넘친 그것들을 방관하고 있는 것도 같았다.

석진은 눈치가 빨랐다. 알고 파악해낸 것들을 굳이 타인에게 티 내지 않을 만큼 섬세했고 동시에 냉소적이었다. 그래서 그런지 상담실에 들어서는 순간부터 많은 것들을 파악할 수 있었다. 알고 싶지 않아도 그냥 보였다. 그런 것들을 없는 취급하고 웃으며 대할 때 불편한 마음이 꿈틀거렸고, 상담실을 나서는 고객에게 '행복하세요'라는 저의 마지막 인사를 건넬 때는 슬픈 마음까지 들었다. 그들의 세세한 사정까진 알 수 없어도, 적어도 사이의 행복감이 어느 정도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지는 알 수 있었으니까.

상담실에 들어서 자기가 앉을 의자만 빼서 앉았을 때부터 알았다. 곧장 다리를 꼬아 앉아 몸을 뒤로 기댔을 때, 팔짱을 끼고 남자 플래너인 저를 비웃듯 훑었을 때, 관혼상제의 혼례를 논하는 자리에서 한쪽 눈을 구기며 모니터를 의미없이 쳐다봤을 때, 예비 신부를 '야'라고 불렀을 때, '말씀을 편하게 하시나 봐요'라는 말에 '격식 차려서 뭐 해요, 이제 결혼할 건데'라고 얘기했을 때. 무엇보다 참을 수 없었던 건, 거슬리다 못해 흘러넘치는 정황 속에서 그저 가지런히 앉아 있는 여자의 모습이었다. 그 모습을 보며 상담을 이어가자니, 내내 부드럽게 지은 미소가 금방이라도 풀려버릴 것만 같았다.

닫혔던 문이 열리고 잠시 자리를 비웠던 남자가 돌아왔다. 아까와 똑같이 건방진 자세를 취한 남자는 물었다.

 

"다 했지?"

 

책임감이라고는 눈꼽만큼도 없는 말. 석진은 쉽사리 입을 열지 않았다. 여자 또한 아무 말이 없었다. 남자는 이상함을 느낀 듯 여자에게 다시 물었다.

 

"왜. 아직이야?"

 

내내 조용하던 여자가 남자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아니. 끝났어."

"잘 됐네. 빨리 끝내고 가자."

 

남자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석진은 맞은편에서 여전히 아무 말 없이 그 둘을 바라 보고 있었다.

 

"계약할 게 없어. 너랑 내가 끝나서."

 

여자의 목소리엔 높낮이가 없었다. 처음부터 끝까지 한결같은 음. 석진은 저도 모르게 침을 삼켰다. 긴장되는 듯 마르기 시작하는 입. 불똥이 저한테까지 튈 순간을 기다리고 있었다. 어쩌면 이 일의 시작은 자신의 말 한마디였을지 모르니까. 물론 이렇게까지 생각하고 뱉은 말은 아니었지만.

 

"뭐?"

 

여자와 달리 남자의 목소리엔 다양한 높낮이가 존재했다. 자신의 기분과 생각에 따라 자유자재로 바뀌는 음. 그 탁한 음과 어울리는 참으로 볼썽사나운 얼굴. 아까보다 한층 더 구겨진 얼굴이었다.

말없이 일어난 여자는 석진에게 목례를 건넨 뒤 조용히 상담실을 나섰다. 그저 서서 여자가 사라진 문만을 쳐다보는 남자. 석진은 자리에서 일어서 목례를 건네며 말했다.

 

"행복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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