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short letter

[민윤기 빙의글] same but different

이런 곳에서 만나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는데. 얼굴을 다시금 뜯어 봐도 분명 그였다. 혹시라도 닮은 사람일까 싶어 눈을 꼭 감았다 뜨는 사이, 뒷사람의 재촉에 안으로 밀려 들어와버린다. 잔걸음으로 가까이 다가서는 지금까지도 시선이 맞는 걸 보니 확실히 민윤기가 맞는데.
마주친 장소가 의외여서 그런지 사고가 잠시 고장난 듯 했다. 민윤기가, 클럽에 있다. 왠지 상극의 두 단어처럼 느껴졌다. 적어도 나를 만난 당시에는 상극이었는데. 안 본 새 생활 패턴이 바뀐 걸까. 주아는 그 찰나에 여러 생각을 늘어놓고 있었다.

"어서오세요. 반갑습니다."

본인임을 확인시켜주기라도 하는 익숙한 목소리가 들리고. 슬쩍 웃기까지 하는 얼굴. 이내 살짝 감은 눈으로 얼굴을 미세하게 젓는다. 지금은 모른척 하자는 무언의 신호였다.

"아는 사람이야?"

일행 중 한명이 윤기에게 슬쩍 물었다. 어느새 윤기 옆자리까지 떠밀려온 주아가 마지못해 앉자 떠도는 생각을 잘라내듯 들려오는 말.

"아니. 종종걸음으로 발랄하게 들어오시길래."

그 말에 옆을 보니 쳐다보고 있던 것이 오래인 듯 꿋꿋한 시선이 저를 향해 있다. 주아는 아무렇지 않게 하기까지 시간이 조금 필요했다. 약간 혼란스러운 마음. 예전과는 사뭇 다른 모습에 은근한 배신감까지 느껴지려는 참이었다.
자신과 함께 온 사람들은 다른 때와는 조금 다른 분위기였다. 조금 더 전투적이고 적극적이 된 것 같은 모습은 주아에게 무의식적인 실망감을 안겨 주고 있었다. 차라리 이 자리가 빨리 파했으면 싶었는데.
하지만 이미 서로를 투명인간 취급하기로 무언의 약속을 마친 상태이니, 저만 이상하게 행동하지 않는다면 될 것 같았다. 바로 옆에 앉아 멀뚱히 다리 꼬고 있는 모습이 신경 쓰이긴 했지만, 서로의 모습 하나하나를 예민하게 받아들여야 할 만큼 텐션이 있는 사이가 아니니까. 마음을 편하게 먹는 수 밖에 없었다. 장소가 ‘클럽’ 이라는 것이 좀 의외였지만, 그도 갑자기 이런 곳에서 새로운 누군가를 만나고 싶은 생각이 들었을 수도 있을 터였다. 그게 아닌들 뭐 어떠한가. 자신도 제 발로 여기 와 있는 사람 중 하나였다.
분위기를 대충 맞추며 사람들을 훑어 봤다. 자신의 일행 중 하나가 나와 깊은 안면이 있던 사이라는 것도 모르고 눈으로 추파를 던지는 사람도 있었고, 분위기 띄우는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는 사람도 있었다.
사실 오늘 이 자리에서 누구와 어떻게 되든 자리를 옮기고 싶은 마음만이 앞섰다. 신경 쓰지 않기로 했지만, 바로 옆에 전 애인이 있는 상태에서 뭔가를 행동으로 옮기기엔 자신의 배짱이 부족했다.
복잡한 마음에 갈피를 못 잡고 있는데, 왼쪽에서 불쑥 양주병이 나타난다. 윤기 옆자리에 있던 남자였다.

"한 잔 드세요."

갑작스러운 권유에 살짝 놀랐지만, 그렇다고 눈치를 보며 그 불편함을 티 내고 싶진 않았다. 어차피 적당히 호응하다 집에 가야하는 운명이라 생각하던 참이었고, 차라리 잘 됐다 싶은 마음이었다. 어찌 됐든 이런 자리에서 누군가와 텐션이 생길 것처럼 보이게 된다면 후에 자연스럽게 자리를 옮길 수 있을 테니. 상대에 대한 관심이 어떻든, 당장 드는 이 불편한 마음을 무시할 돌파구는 만들 수 있을 것 같았다. 뭐가 됐든 적어도 옆자리는 피할 수 있겠지.

"제가 드릴게요."

줄곧 등을 기대고 있던 윤기가 주아의 시야를 가리고 나서며 말했다. 그리고는 병까지 빼앗아 들며 덧붙인다.

"왠지 와인 더 좋아하실 것 같은데. 맞죠.”
"내가 드린다니까."

남자가 다시 윤기 손에 들려 있는 병을 잡으려 하자, 그를 제지하며 다시 말한다.

"내가 한 번 드리게."
"이 새끼 그렇게 안 온다더니, 막상 오니까 적극적이네."
"적극적은 무슨."

그 나지막한 중얼거림은 시끄러운 소음에 묻혀 주아 밖에 듣지 못한 듯 싶었다.

"받으세요, 얼른. 팔 떨어지겠네."

그리고는 싱긋. 분위기 망치지 말고 적당히 놀다 싸게싸게 가자는 또 다른 신호인가. 보아하니 본인이 원해서 온 것 같진 않고.
주아는 아무래도 이런 속임수 속에서 자연스러운 행동을 취하는 건 본인의 적성이 아니라고 느껴졌다. 하지만 다른 수는 없었다. 멈칫하다 응하려는 사이, 이번에는 주아 옆쪽에서 또 다른 손이 잔을 들고 나섰다.

"주아가 오늘 술이 안 땡기나 봐요. 저 한잔 주실래요?"

자신의 일행 중 하나가 윤기를 마음에 들어하는 눈치였다. 그래, 오늘 네가 찜한 사람이 공교롭게도 이사람이구나. 주아는 기왕 모른척 하기로 한 거, 둘 사이에서 빠져주겠다는 액션으로 팔짱을 껴 등을 기댔다. 그러니 왈.

"아뇨, 이 분이요. 안 받고 뭐 하세요?"

윤기의 단호한 어투에 양쪽 사람들이 콧바람을 내쉬며 물러났다. 타올랐던 흥미는 장소 때문인지 쉽게 접어버린 듯 했다. 맞닿은 시선은 끊길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갑자기 공간에 둘만 남겨진 듯한 기분이 들었다. 새삼스러운 장소에서 마주친 민윤기가, 전엔 없던 고집을 부리고 있었다. 뭘 어쩌려고 저러는 걸까. 어쩌면 이것도 너무 많은 의미를 부여하고 있는 건지 몰랐다. 제가 이 장소를 어서 벗어나고 싶어하는 것처럼, 그도 오로지 그런 생각만 하고 있을지 모를 일이었다.
가만히 눈을 맞추다 손끝으로 앞에 있는 잔을 슬쩍 미니, 이내 삼분의 일만큼의 술이 채워진다.

“나도.”

별안간 가까이 붙은 입이 저만 들을 수 있게 속삭였다. 몸에 오소소 소름이 돋을 것만 같았다.
병을 건네받아 비슷한 양의 술을 따르자, 일방적으로 잔을 부딪힌 뒤 술을 한입에 털어넣는다. 그 모습을 가만히 보다 뭔가에 홀린 듯 주아도 술을 쭉 들이켰다.

“재회주였다고 생각해.”

분명 입은 움직이지 않은 것 같은데. 그의 속삭이는 목소리가 곧장 귀로 꽂혀왔다. 주아는 어느 순간부터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마치 입이 붙어버린 것 같았다. 생각해보니 룸을 들어서고 난 뒤에 저는 윤기에게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는 걸 깨달았다. 어쩌면 처음부터 이럴 걸 예상했던 걸까. 술을 한모금 들이키고 나니, 안 그래도 어지러웠던 마음이 더욱 혼란스러워져 버린 듯 했다.
그저 행동을 살피던 윤기가 갑자기 한손으로는 짐을, 다른 손으로는 덥썩 주아의 손을 잡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저희 먼저 가요.”

순간의 정적도 잠시, 곧장 시끄러워지는 공간. 윤기는 사람들 입에서 나오는 말이 어쨌든 상관없는 듯 밖으로 나섰다.
룸을 나서고, 긴 복도를 지나, 사람들을 뚫고 계단을 올라서 밖으로 나오기까지. 모든 게 느적느적하게 느껴졌다. 자신보다 한두발 앞서 가는 뒷통수는 이따금씩 걸음에 따라 머리카락만 찰랑였다. 미적지근하지도 그렇다고 뜨겁지도 않은 손은 너무 낯설어, 처음 잡아보는 다른 사람의 손처럼 느껴졌다.

“미안. 얼른 가고 싶어하는 것 같길래.”

밖으로 나오고 나서야 뒤돌아 마주 본 윤기가 말했다.

“뭐.. 편하진 않았어.”
“그랬겠지.”

우리가 나눌 수 있는 대화는 딱 이정도인 것 같았다. 갑자기 잘 지냈냐며 그간의 안부를 묻기도, 다른 주제의 얘기를 꺼내 분위기 전환을 하기도 이상할 것 같았다. 나쁘게 헤어졌다고는 할 수 없었지만, 헤어진 사람과 우연히 만나 일상적인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사람이 세상이 몇이나 될까. 이만 먼저 가보겠다고 해야 할까.

“너도 많이 불편했지.”

하지만 뜻하지 않은 말이 불쑥 튀어나왔다. 술기운을 빌려 뱉은 말이라고 하면 맞을까. 주아는 갑자기 드는 생소하고 부끄러운 느낌에 그의 입만 응시하고 있었다.

“그다지.”

그가 어깨를 슬쩍 들썩이며 답했다. 이윽고 또 다시 정적이 찾아왔다. 생기 넘치는 밤거리에 서 둘 사이에만 흐르는, 어찌 보면 이상할 것 하나 없는 정적. 주아는 말없이 고개만 두어 번 끄덕였다.

“그럼.. 나 먼저 갈게.”

윤기도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조심히 가.
쭈뼜거리는 모습을 더 이상 보이고 싶지 않아 얼른 돌아섰다. 북적이는 사람들 사이를 헤치며 나아가자니 꼭 헤어지던 날 생각이 났다. 그날도 지금과 똑같았다. 먼저 가겠다는 말로 제가 먼저 돌아섰고, 그는 ‘조심히 가’라고 했다. 그가 바로 돌아섰는지, 제 모습을 지켜보며 우두커니 서 있었는지는 모른다. 그냥 그게 우리의 마지막이었다. 이제는 지금이 마지막이 될 터였다. 같지만 같지 않은 대화를 나누고 헤어지는 지금이.
주아는 괜히 시큰해지려는 코를 비볐다. 찬바람을 맞으니 급하게 올랐던 술기운이 모두 증발해버린 것 같았다. 불어온 바람에 자켓 한쪽이 어깨 뒤로 넘어갔다.

“데려다 줄게.”

이내 넘어간 자켓 한쪽을 여며주는 손길. 윤기였다.

“괜찮으면.”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