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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hort letter

[전정국 빙의글] 엘리베이터 안에서

1시가 넘은 시간. 정국이 검정 봉지를 달랑거리며 엘리베이터를 기다렸다. 아직 많이 쌀쌀한 새벽 공기. 후드 모자를 뒤집어쓴 채 깜빡이지 않는 눈으로 엘베 시그널을 좇았다. 복도엔 슬리퍼 끝으로 바닥을 콕콕 찌르는 소리와 비닐봉지 부스럭대는 소리만 짧게 울렸다. 이상하리만치 말똥한 새벽. 유난히 조용한 밤.
B3, B2, B1, 1. 맑은소리와 함께 엘리베이터 문이 정국의 코앞을 스치며 열렸다. 금방이라도 빨려 들어갈 것처럼 문앞에 바짝 서 있던 정국은 그대로 멈춰 설 수밖에 없었다. 한쪽 발은 올렸지만, 차마 몸까지 실을 수가 없어서.
정적. 그리고 그 정적을 덮는 적나라한 소리. 다른 사람이 타든 말든 개뿔도 상관없어 보였다. 문이 열리기 전부터 불타오른 것 같은 스킨십. 남자는 여자의 턱 아랫목에 입을 맞추고 있었고, 여자의 고개는 살짝 꺾여 있었다. 새벽의 정적, 질척한 입소리, 거기에 간혹 밖으로 뱉는 숨소리까지. 그 삼박자가 정국의 사고를 망치고 있었다. 취객들의 쇼인가. 새벽이니 그럴 만도 하긴 한데. 그래도 아파트 엘리베이터에서 이러는 건 좀.. 그렇게 급하면 근처 모텔을 잡든가.. 차마 눈은 떼지 못한 정국이 저도 모르게 생각을 늘어뜨렸다.
3초는 지났으려나. 추위에 못이겨 이들과 같은 공간에 있는 모험을 택하기엔 깡이 부족했다. 아무래도 다음 턴을 기다려야겠다는 생각에 발을 뒤로 빼려는 찰나, 남자와 눈이 마주친다. 온몸의 세포가 쭈뼛 서는 느낌. 키스는 멈추지 않고, 눈은 저를 향했다. 빨리 꺼지라는 무언의 압박인가. 정국은 당황스러움에 몸이 또 한 번 굳고 말았다. 엘리베이터 문이 정국의 양 어깨를 짓누르려는 즈음 여자 허리에 붙어있던 손이 버튼을 향했다. 그 긴 손가락으로 꾹 누르는 버튼. ‘열림’이었다. 이 상황에 열림을. 잘못 누른 거 아닌가?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활짝 열리는 문. 아직도 떼지 않는 시선. 정국은 저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키며 홀린듯 같은 공간 안으로 발을 내디뎠다. 이내 남자가 버튼을 바꿔 누르며 문이 닫혔다.
한층 고요해진 공간의 정적과 못지 않게 커진 질척한 소리. 정국은 간신히 눈만 굴려 옆을 훑었다. 최대한 이 둘에게 시선을 주지 않겠다는 강한 신념을 갖고서. 버튼은 아무것도 눌려 있지 않았다. 그래, 이거 누를 정신이야 있었겠냐. 13층까지 1분 안 될 그 시간 동안 최대한 투명인간인 척 하다가 내리는 수 밖에 없었다. 마음과 달리 삐걱거리며 움직이는 정국의 손이 조용히 숫자 13을 향하자 찰나에 닿은 두 손. 때마침 같은 버튼을 누르려고 했던 남자의 손이었다. 정국은 저도 모르게 숨을 참으며 얼른 손을 거뒀다. 반면 조금의 당황한 기색도 없는 남자는 그대로 버튼을 누른 뒤 다시 여자의 허리를 잡았다. 새벽 공기에 노출 됐던 저의 손은 차가웠고, 다른 손은 데일 것 같은 착각이 들 만큼 뜨거웠다.
밀폐된 공간 안에서 남의 키스 소리를 듣는 일은 생각보다 더 고역이었다. 이건 영상물을 보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곤욕스러움이었다. 그래. 나는 이런 깡이 0.1그램도 없었다. 조용히 하려는 노력이라도 해준다면 되려 감사하다고 절을 할 판이었다. 엘리베이터 사방에 배치된 거울이 참으로 원망스러웠다. 그들을 보려고하지 않아도 보였다. 소리만으로도 이미 머릿속에 상황이 그려져 더욱 괴로웠다. 여자가 입은 자켓 한쪽은 반쯤 벗겨져 민소매 끈이 드러났고 옆으로 흘려내린 속옷 끈도 보였다. 안 본다고 안 봤지만, 사실은 모든 장면 하나하나가 이미 머리속에서 자동재생되고 있었다. 정국은 한번 더 침을 삼켰다.
그 와중에 남자는 계속해서 정국을 보고 있었다. 고개를 바꾸어 꺾는 와중에도 시선은 한 곳에 머물렀다. 정국은 남자가 왜 그렇게 저를 쳐다보는지 알 수 없었다. 아마 이 상황을 한껏 즐기며 짓궂게 구는 사이코일 거라고 생각했다. 눈이 맞는 순간이 되려 수치스러워 피하다가도, 찰나의 그 느낌이 묘해서 저도 모르게 자꾸만 옆을 힐끔거렸다. 적나라한 스킨십을 힐끔거리는 게 아니라 사람을 의식하고 있었다.
침을 몇 번이나 삼켰는지 셀 수도 없었다. 침 삼키는 소리가 다른 소리에 묻혀 들리지 않았던 게 천만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엘리베이터 시그널은 이제 5층을 향해 가고 있었다.
7층. 짓궂은 행동에 흥미가 떨어지기라도 한 건지 남자는 눈을 감고 행위에 집중하고 있었다. 그의 시선에서 자유로워진 정국은 조금 더 과감하게 옆을 관찰하기 시작했다. 모든 게 참기 힘든 장면이었지만, 개중 정국의 시선을 잡은 것은 손이었다. 크고 굵은 손이 여자의 등과 허리춤을 부드럽게 드나들며 더듬거리는데, 직전에 그의 눈이 정국을 꼼짝못하게 잡고 있었다면 이번에는 그 손이 그랬다. 망설임 따위는 없는 그 움직임이 정국의 시선을 꽉 잡고 놔주지 않았다.
넋놓고 커진 눈으로 손의 움직임을 집요하게 좇던 정국이 고개를 세차게 흔들며 시선을 거뒀다. 간신히 정면을 응시하는 눈. 이제는 한계가 올 것 같은 느낌이었다. 더 이상 보면 안 될 것 같았다. 분명 이 상황에서 옳지 않은 행동을 하는 건 저들인데, 꼭 자신이 엄청난 범법행위라도 저지르는 느낌이었다.
그들이 멈춘 건 엘리베이터가 11층에 다다랐을 때였다. 13층이 되면 총알탄처럼 튀어나가야겠다고 생각했지만, 자연스럽게 옷을 추스른 뒤 엘리베이터 문 앞쪽에 나란히 자리한 저들을 앞질러 나갈 자신은 없었다. 아무일 없었다는 듯 정돈되어 있는 옷. 단단하게 허리춤을 감싼 손. 정국은 그들의 뒷모습을 은밀하게 탐했다.
13층에 도착하고, 어서 이들이 먼저 사라졌으면 하는 마음에 엘리베이터에 우두커니 남아 있었다. 하지만 오른쪽으로 향한 걸 보니 방향도 같은 모양이었다. 왜 갑자기 컵라면은 사러 나와가지고. 마음을 가다듬고 엘리베이터 밖으로 향했다. 정국은 또 그들 뒤에 선 모양이 되었다.
바지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고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둘 다 그동안 본 적 없는 사람들인데. 새로 이사온 부부인가. 왠지 부부같진 않고. 커플인가. 그저 당연하게 집을 갈 뿐인데, 왠지 가면 안 되는 곳을 가는 것만 같아 걸음이 제 속도를 내지 못했다.
한 번을 떨어지지 않고 허리에 붙어 있는 손. 눈동자가 이리저리 움직이다 멈추는 곳은 다시 거기였다. 크고, 굵고, 예쁜, 다소 구릿빛의 손. 분명 그보다 더 저의 시선을 잡을만한 장면이 있었는데도 왠지 자꾸만 손을 쳐다보게 됐다.
이윽고 멈춰선 그들. 도어락 소리와 함께 천천히 문이 열리고 여자가 먼저 안으로 들어갔다. 이제 저 사람만 들어가면 마음을 놓을 수 있겠다 싶은데 예상과 달리 남자는 문을 잡고 가만히 서 있었다. 집은 남자를 지나쳐 가야만 했다. 왠지 바보 같이 행동하고 싶진 않았지만, 저도 모르게 걸음이 느려졌다. 이러면 자존심 상하는데. 문 안쪽을 보며 짧은 대화를 나눈 남자가 다시 정국을 쳐다봤다. 이상하게 심장이 뛰었다. 나보다 잘생기고 키가 커서 그런가. 그래도 몸집은 비슷한 것 같은데. 점점 가까워지는 거리. 열려 있는 문 탓에 몸을 옆으로 비켜 지나가야 했다. 교차되며 살짝 닿은 서로의 옷. 엘리베이터에서는 느끼지 못했던 향수냄새가 훅 느껴졌다. 정국이 지나가는 대로 따라가는 남자의 시선. 정국은 괜한 부끄러움에 저도 모르게 고개를 숙였다. 한집을 지나고, 또 한집을 지나서 문 앞에 멈춰선 정국은 슬쩍 고개를 돌렸다. 아직도 문을 잡은 채 저를 쳐다보고 있는 남자. 유연하게 휘어지는 입꼬리와 함께 웃어 보인다. 이내 닫힌 문. 그대로 멈춰섰던 정국이 집으로 들어섰다. 또 한 번의 정적. 현관 센서등이 꺼지고 정국이 가슴 한켠을 손으로 툭툭 두드렸다. 뭐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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