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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hort letter

[김태형 빙의글] 1인 청룡열차


"알아서 해야지."


서운함에 억장이 무너진다. 주어가 나였든 너였든, 세상이 무너지고 세계가 무너져. 무자비할 정도로 날카로운 말이 가슴을 난도질하면, 차례로 따라오는 감정 없는 눈빛에 심장이 바닥까지 툭 떨어져 짓밟힌다. 아무런 말과 모션 없이도 심장을 잘근잘근 밟고 또 밟고. 밟힌 마음은 바닥에 끈적하게 눌어붙어 희미하게 두근. 그럼에도 멈추지 않고 두근두근.
순간 마음을 소용돌이치게 만들었던 말은 멀리 사라진 지 오래였다. 늘 그랬듯 말은 사라지고 거하게 휩쓸린 마음만 남는다. 이 수용적인 마음은 하루에도 몇 번이고 뒤바뀐다. 말 한마디에 따라서, 기분과 태도에 따라서. 멈추지 않을 것 같은 이 감정의 열차에서 눈을 질끈 감고 몸을 내던지는 것 밖엔 할 수가 없었다. 늘.
난장판 된 그녀의 마음이 금세 제자리를 찾으면,

"그래."

그저 끄덕끄덕. 심박이 제자리를 찾고. 그저 그러는 게 다.
5년 하고도 3개월. 거기에 17일을 함께했다. 초겨울에 만나 꼬박 다섯 번의 겨울을 함께했다. 곁엔 항상 태형이 있었고 그게 좋았다. 자신과 다르게 속도 재지 않고 달려들고 보는 것이 좋았고, 제풀에 죽어 혼란스러워하는 모습도 좋았다. 가끔 주변 상관 않고 큰 소리로 펑펑 울어 사람을 당황시키는 것도, 어찌할 바를 몰라 멀뚱히 있는 모습에 왜 같이 울어주지 않느냐고 소리치며 서러워하는 것도 좋았다. 언젠가 발을 헛디뎌 깁스를 하고 나타나 매사에 툴툴거리던 것도.
차라리 좋지 않았던 적을 꼽는 것이 더 편하려나.
어딜 봐도 있을 땐 조금 답답하기도 했고, 막무가내로 달려들어 몸과 마음 모두 피곤하기도 했다. 원치 않게 주변의 이목을 집중시켜 부끄러운 적도 많았고 같은 감정을 강요해 조금 지쳤던 적도 있었다. 하지만 여전히 다 좋았다. 불편해도 좋았고 대뜸 당황스러움을 던져도 결국 '좋다'로 귀결됐다. 좀 이상하지. 좋지 아니한 적이 없었다. 이렇게 찢긴 마음 하나하나를 눈물로 다시 꿰매는 와중에도, 없었다. 함께인 시간 속에서 좋지 않았던 적을 꼽는 일 같은 건 영영 하지 못하겠다는 생각이 마음에 와 박혔다.
언젠가부터 너는 어떨까 생각했다. 나는 이런데 너는? 나는 마주 보는 네 눈길 한 번에도 제멋대로 튀어나가버리는 마음을 진정시키느라 행복한 힘이 드는데. 나는 어느새 내 입맛은 다 잊어버려, 오 년 전의 내가 무엇을 더 좋아했는지를 까먹고, 계획된 야외 데이트보다 우리 집에 각자 누워 보내는 시간이 많아졌어도 같은 공간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좋은데. 날카로운 말들로 난도질당한 마음을 다시 원상태로 돌리려고 무던히도 애를 쓰는 나인데. 너는. 너는 어떠니.
어쩌면 필요 없지 않을까? 나 같은 건. 그녀는 영영 밖으로 뱉지 못할 수많은 물음들을 꾸역꾸역 삼켰다.
직장에 들어가고부터 부쩍 달라졌다고 생각했다. 달라졌다고 하는 게 맞으려나. 원래 태형은 그런 사람이었는데, 그동안은 내 착각이었던 게 아닐까 싶었다. 그녀는 언제부턴가 자신의 생각과 감정에 자신이 없었다. 혼자 자꾸 되묻고 또 되묻게 됐다. 뭐가 나를 이렇게 만들었지. 이 맥주 때문인가.

"요즘 자주 마시네."

소파에 축 늘어져 눈길도 주지 않고 묻는다. 태형의 시야각이 부쩍 넓어진 것 같다고 생각했다. 직접 눈길을 주지 않고도 상대가 무엇을 하는지, 먹는지, 보는지 다 알 수 있는 마법 같은. 그저 본인이 하던 일을 계속하면서 메마른 질문 하나 툭 던지면 되는 어떤 신비한.

"응."
"그거 맛있어?"
"응."

결코 기계적이지 않은 대답을 내리 뱉고 맥주를 벌컥벌컥. 여자는 혼술의 맛을 알았다. 눈앞에 애인이 있어도 저 혼자만 동떨어져 음주하는 알싸한 이 기분을 언젠가부터 너무 잘 알아버렸다.
허공 어딘가를 응시하며 맥주만 마시자 소파에 올렸던 발을 바닥에 내려 앉는다. 그래도 여전히 구부정한 자세. 등이 조금 굽고 고개가 앞으로 조금 나왔다. 처음 만났을 때처럼 꼿꼿한 자세를 한 태형은 보기 드물었다. 한몸처럼 붙어 있던 휴대폰은 화면이 그대로 켜진 채 소파 위에 놓여 있었다. 분명 인스타그램을 반복해서 보고 또 봤겠지 싶었다. 근데 나 지금 허공 보고 있는데. 직접 눈길을 주지 않고도 상대가 무엇을 하는지 아는 신비한 눈을 가진 건 태형뿐만이 아닌 것 같다고 생각했다. 그녀 자신 또한 어느새 시야각이 넓어져 있었다.

"나도 그거 마셔볼래."
"이거 밖에 없는데."
"나눠 마시면 되지."

태형이 몸을 일으켜 테이블로 걸어온다. 기지개를 켜며 배 언저리를 긁어대니 얇은 티셔츠가 손가락에 딸려 올라가 배가 드러났다. 군살하나 없는 배. 등이 굽고 고개가 앞으로 빠졌어도, 관리를 소홀히 하지 않는 사람.
요즘은 한 캔으로도 부족했다. 예전엔 반 캔만 먹어도 힘들었는데. 묶음으로 사뒀던 맥주가 동이 나고 마지막 남은 한 캔이었다. 이 순간의 유일한 낙인 맥주를 몽땅 건네기가 사무치게 아쉬웠다. 벌컥벌컥. 말려 올라간 티셔츠를 안주 삼아 한입 가득 머금고는 캔을 건넸다.

"이거 말고."

순식간에 맞닿은 입 사이로 양껏 머금었던 맥주가 빨려 들어갔다. 매번 놀랍고 새로운, 지긋지긋하도록 똑같은 패턴. 늘 떨리고 늘 꼼짝하지 못하는. 그저 눈 감는 것 밖에 할 수 없는 이 순간. 가슴이 뛴다. 또 다시 멈추지 않을 것 같은 이 열차에 강제적으로 몸을 실으면, 가까워진 상대의 몸에 전달되기 위한 것이 마지막 사명인 것처럼 가슴이 가열차게 뛰고 또 뛰었다.
스르륵 감는 눈에 담기는 빛이 희미해지는 만큼 남아 있는 희망도 사라져가고 있었다.
이 올가미 같은 행복에서 벗어날 수 없을 것 같아. 바깥에 간신히 닿을 것 같으면 다시 당기고, 이제 다리만 올리면 된다고 생각했을 땐 더 세게 당긴다. 키보다 크지도 않은 이 가상의 공간을, 그냥 벌떡 일어나 걸어나가면 순식간에 벗어날 수 있을 것 같은데. 그저 웅크린 채 몸 만한 작은 무형의 공간 안에 갇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버둥버둥. 그녀가 할 수 있는 거라곤 버둥거리다 맥주처럼 다시 빨려가는 것. 그게 다였다.



비 온다. 그녀가 창 옆 테이블에 앉아 작게 중얼거렸다. 언젠가부터 여기 앉아 있는 시간이 많았다. 특히 비가 오는 날. 이렇다 할 말로 채워지지 않는 방에 조곤조곤한 빗소리가 차는 게 좋았다. 그녀의 마 뜨는 순간들은 내리는 비가 촘촘하게 채워줬다. 종일 그치지 않을 것 같은 비였다. 마음을 한시름 놓는 순간 기지개를 켜며 창문께로 다가온 태형이 밖을 살폈다.

"그러네. 나갈래?"

양손으로 얼굴을 반 가린 채 고개를 저었다. 끕끕해.

"옥상 가자."

그녀의 의사는 그닥 상관없는 듯했다. 분명 싫댔는데. 예고 없이 외출하는 것만큼 귀찮은 일이 또 어딨다고. 입을 꾹 다물고 고개만 다시 내저었다.

"나 비 맞고 싶어."
"대머리 되고 싶어?"
"있지. 비가 산성이라 맞으면 머리가 빠진다고 알려져 있지만 사실 비의 산성도는 콜라나 오렌지주스 같은 음료, 우리가 쓰는 화학세제보다도 훨씬 낮아. 그러니까 비 맞는다고 대머리가 되진 않아. 산성이라 영향이 있긴 하겠지만 말이 약간 너무 와전됐다는 거지. 그리고 내 머리를 봐. 내가 그렇게 쉽게 대머리 될 것 같아?"

태형은 양손으로 머리를 잡아당기며 맞은편에 앉았다. 부쩍 논리적인 체 하는 장황한 설명을 자주 해댔다. 한 바퀴 정도 돌려 한 영양가 없는 말. 그치만 그녀에겐 그 어떤 말보다 늘 직설적이었다.
여전히 얼굴을 감싸고 있는 손안에서 작은 한숨이 울려 퍼졌다. 그러면 활시위처럼 당겨지는 태형의 입꼬리. 오늘도 그녀의 뜻대로 되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이곳에 산 지 오래였지만 옥상에 발을 들인 적은 없었다. 한 눈에 봐도 관리가 잘 되어 있지 않았다. 여기저기 녹이 슬고 누군가 가꾸려고 했던 것 같은 화단은 잡초밭이 된 지 오래인 것 같았다. 여자는 옥상으로 향하는 문 앞에 서서 망설였다. 한 발자국만 더 나가면 온 몸이 삽시간에 젖을 게 뻔했다. 이미 흠뻑 젖어 이리저리 움직이는 모습을 마냥 바라보기만 했다.

"나와 봐."

먹먹해진 빗소리 사이로 세글자가 귓속에 와 박힌다. 이내 다시 또렷해지는 빗소리. 여자는 고개를 저었다.

"추워."

태형은 아까보다 훨씬 큰 미소를 지었다. 사랑해 마지 않는 웃는 얼굴. 따라 웃을 수 밖에 없었다. 웃고 싶어서 웃은 건 아니었지만 얼굴이 자동화된 패턴처럼 저절로 웃음을 만들어냈다.
태형이 슬리퍼를 끌며 와 주저하는 여자 앞에 섰다. 힘없이 축 쳐져 있던 오른팔을 당기니 그녀가 축축한 세상으로 한걸음 내딛는다. 빗줄기는 집에서 보던 것보다 세져 있었다. 거세진 비가 금세 머리와 얼굴을 적시고, 루즈한 티가 젖어 몸에 달라붙고. 추위에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전봇대처럼 멀뚱히 서 있는 모습을 웃으며 보다 이내 태형이 그녀의 주변을 돌기 시작한다. 기분 좋을 때마다 부르던 작자미상의 콧노래와 함께. 사방을 때리는 빗소리와 태형의 콧노래가 섞여 불협화음을 만들었다. 이내 검지 끝을 그녀의 몸에 대고 다시 주변을 뱅글뱅글. 움직임이 격해져도 손 끝은 떨어지지 않았다. 온 신경이 몸에 닿은 손가락 집중돼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추위를 느끼는 것도, 억지로 비를 맞는 지금이 싫어 미간을 구기는 것도.
손가락이 골반 언저리와 배를 비뚠 대각선으로 지나 가슴과 어깨, 쇄골, 그리고 목에 닿는다.

“재밌지.”

천진난만한 얼굴을 바짝 들이밀며 말한다. 잠시 멈췄던 숨을 간신히 터트리면, 다시 그 숨을 입으로 막는 태형이었다.
지겹도록 설레는 늘 같은 패턴. 복잡한 마음과 달리, 그저 눈을 꼭 감는 것 밖에 할 수가 없다.




넌 짬뽕. 난 짜장. 언제부턴가 암묵적으로 정해진 룰 같은 거였다. 서로의 것을 나눠 먹기도 해서 큰 의미는 없었지만, 어쨌든 넌 짬뽕, 난 짜장이었다.
맞은편의 그는 뜨거운 짬뽕으로 허기를 달래느라 여념이 없었고, 짜장을 시킨 그녀의 왼손은 면발보단 스마트 폰을 훑느라 바빴다. 밥을 먹으면서 태형의 카톡창을 훑는 것도 일상이 되어 있었다. 밥 먹는 시간엔 밥이 제일 중요했던 그녀였지만, 언젠가부터 태형의 폰을 훑는 것이 더 중요한 일이 되어 있었다.
금세 짬뽕의 반이 비워지고 짜장은 삼분의 일도 채 먹지 않았을 때 여자가 물었다.

"왜 태대리님이야?"
"김태, 형."

태형이 입에 짬뽕을 가득 물고 '태'에 힘주어 말했다.

"보통 김대리님이라고 하지 않나."
"근데 걘 그렇게 부르더라?"

이내 후루룩. 맛깔나게 면치는 소리.
김유리 사원. 대화창을 더 위로 올렸다.
-태대리님
-요청하신 자료 메일로 보냈습니다
-태태대리님
-메일 발송한 것 확인 부탁드립니다
-근데 태대리님이라고 하니까
-뭔가 사자 같지 않아요? 태사자

까분다.
줄곧 답이 없던 그는 세 글자의 답장을 보냈다. 언젠가 나한테도 한 적이 있는 말인데. 언제인지는 정확하게 기억나지 않았다. 눈에 콕 박힌 세글자를 애써 뒤로 삼키고 말했다. 여긴 또 태태대리님이라고 하네. 여자가 휴대폰을 내려두고 태형을 흉내내며 크게 한입 먹었다.

"이랬다저랬다 해."
"다들 그래?"
"아니. 걔만."

웃기는 짬뽕이야. 피식대며 거의 다 먹은 짬뽕을 이리저리 휘젓는다. 가라앉아 있던 오징어를 건져 한 입에 넣고 오물오물. 그저 짬뽕 그릇만 붓들고 또 다시 휘젓는다. 지금 태형에게 가장 중요한 건 짬뽕 안 어딘가에 있을 오징어를 찾는 일인 듯이. 이 순간 자신이 가장 열정적일 수 있는 일.
가만히 앉아 그 움직임 하나하나를 눈으로 좇다, 입에 물고 있던 짜장면을 얼른 씹어 삼켰다. 후루룩. 저도 이 지금 가장 중요한 일이 짜장면을 먹는 일인 것처럼, 열정적으로 다시 한 번 후루룩.​



"맨날 롤러코스터 타는 것 같아."
"너 롤러코스터 좋아하잖아."
"지금은 싫어."
"엊그제 탄 건 뭐야? 재밌다고 잘만 즐겨놓구."
"야. 사람들이 롤러코스터를 좋아하는 건 가끔 느끼는 드라마틱한 즐거움 때문에 좋다는 거야. 사람이 놀이동산에서 365일 24시간을 살진 않잖아. 보통은 몇 달, 몇 년 만에 한 번씩 가서 즐기고 오는 게 놀이동산이잖아. 롤러코스터를 맨날 타면 어떻게 될 것 같아? 맨날도 아니다. 예고 없이 매시간, 매분 탄다고 생각하면 그게 과연 즐거울까?"

늘 듣기만 했던 돌려 말하지만 직설적으로 다가왔던 화법. 의도한 건 아니었다. 그저 이 순간 하고 싶은 말을 쭉 뱉다 보니 저렇게 장황해지고, 언뜻 논리적으로 보이고. 막힘없이 쭉쭉. 하나 신기했던 건 약간의 해소감이 있었다는 거다. 뭔지 모를 해소감. 태형은 매일 이런 기분을 느꼈던 걸까? 왠지 아무렇지 않게 더 한 말도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너 예전에 놀이동산에서 살고 싶다고 했었잖아."

줄곧 음식을 가득 물고 웅얼거리다, 다 삼키고 또박또박 대꾸한다. 드디어.

"해보니까 별로야."
"맨날 오고 싶다며."
"기분이 거지 같아져."
"..."
"헤어져."

마음이 뻥 뚫리는 느낌. 엄청난 해방감에 심장이 터질 듯 뛰었다. 아주 오랜 기간 인생의 일부처럼 메여 살았던 올가미를 갈기갈기 찢어발긴 느낌. 그 무형의 공간을 짓밟고 빠져나온 느낌. 이 순간 진심으로 마음 담아 할 수 있는 유일한 말인 것 같았다. 차오른 눈물과 함께 완전히 사라진 줄 알았던 희망 한가닥이 살아나고 있음을 느꼈다. 참 아이러니하게도 이 관계의 끝자락에서.

나는 너를 너무 사랑하니까 헤어져.
네가 나한테 주는 사랑이 너무 커서 숨쉬기 힘드니까 헤어져.
지금이 아니면 헤어질 수 없으니까 헤어져.
우리 이 순간 헤어지자.

하지만 더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저 우두커니 서서 가빠진 숨을 내쉬는 것 밖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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