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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탄 빙의글

[전정국 빙의글] 당신의 절망을 바라는 나에게 "우리 어차피 계속 못 만날 거잖아" 그 말은 정국에게 꽤나 큰 충격을 가져다줬다. 순간 숨 쉬는 것도 잊게 할 만큼. 사방이 단단한 쇠로 막힌 깜깜한 방에 갇혀 사정없이 머리를 부딪히는 느낌이었다. 이론적인 고통은 극심한데 정신은 오롯이 다른 곳에 있어 아픔조차 인식할 수 없는 그런 느낌 같았다.젓가락질이 멈추고 오물거리던 입도 일순간 얼어붙는다. "무슨 말이에요?""그렇잖아." 놓았다, 가 정국이 받은 느낌이었다. 자신과 관련된 모든 걸 저 한마디로 놓은 것 같다고. 그리고 이어지는 말은 없었다. 그렇잖아, 가 끝이었다. 그게 그녀가 우리를 놓는 방식이라는 생각이 머리부터 발끝까지 스며들어 심사를 뒤틀리게 만들었다.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고삐가 풀리는 모습을 보이고 싶진 않았지만, 그렇다고 이대로 .. 더보기
[김태형 빙의글] 1인 청룡열차 "알아서 해야지." 서운함에 억장이 무너진다. 주어가 나였든 너였든, 세상이 무너지고 세계가 무너져. 무자비할 정도로 날카로운 말이 가슴을 난도질하면, 차례로 따라오는 감정 없는 눈빛에 심장이 바닥까지 툭 떨어져 짓밟힌다. 아무런 말과 모션 없이도 심장을 잘근잘근 밟고 또 밟고. 밟힌 마음은 바닥에 끈적하게 눌어붙어 희미하게 두근. 그럼에도 멈추지 않고 두근두근. 순간 마음을 소용돌이치게 만들었던 말은 멀리 사라진 지 오래였다. 늘 그랬듯 말은 사라지고 거하게 휩쓸린 마음만 남는다. 이 수용적인 마음은 하루에도 몇 번이고 뒤바뀐다. 말 한마디에 따라서, 기분과 태도에 따라서. 멈추지 않을 것 같은 이 감정의 열차에서 눈을 질끈 감고 몸을 내던지는 것 밖엔 할 수가 없었다. 늘. 난장판 된 그녀의 마음이 .. 더보기
[전정국 빙의글] 곧게 삐뚤어진 사이 입을 동그랗게 말고 기분 나쁜 연기를 연신 뿜어낸다. 삽시간에 정국의 얼굴을 덮친 연기는 서서히 떠오르다 이내 처음부터 없었던 듯 사라지기를 반복했다. 눈 하나 깜짝 않고 정국을 주시하다 이내 말한다. “넌 내가 왜 좋니.” 꼰 다리가 네모난 테이블 영역 밖으로 벗어나 있었다. 몸을 곧게 세우고 앉아 있는 정국과 달리 한껏 비뚤어진 그녀의 자세는, 둘의 미래를 말해주는 작은 복선 같이 느껴졌다. 함께 있는 이 짧은 순간에도 결코 섞일 수 없다는 듯한. 정국을 서서히 찌르고 죽이는 그런 아주 작고 사소한 것들. 정국은 그것들을 버텨내고 있었다. 아무 말없이.그녀는 정국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굳이 말을 하지 않아도 그의 눈은 늘 많은 말을 했으니까. 그녀는 그런 그의 마음을 단박에 읽어낼.. 더보기
[김태형 빙의글] 팬지 (pansy) 맨발바닥이 바닥에 붙었다 떨어지며 쩍쩍 갈라지는 소리를 냈다. 여름 장마철이었다. 습기와 끕끕함을 가득 머금은 방 안에 초조하고 축축한 걸음이 쉴 새 없이 움직였다. 미처 다 마르지 않은 머리를 거칠게 뒤로 넘기면, 오른쪽 어깨에 아슬하게 걸쳐 있던 실크 가운이 아래로 흘러내린다. 흘러내린 가운을 따라 옮기는 시선에 담기는 붉은 선과 점들. 망가진 차림을 추스를 겨를은 없었다. 잘근잘근 손톱을 물어뜯는 전엔 없던 습관이 막 생길 참이었다. 5분도 채 되지 않은 사이 엄지 끝이 들쑥날쑥 갈려 있었다. 파고드는 아픔을 인식할 새도 없이 더욱 맹렬하게 움직이는 입과 달리, 부릅뜬 눈은 어느 한 곳도 응시하지 못했다. 비가 계속해서 창문을 때렸다. 거센 바람이 불어 불규칙한 소음을 만들다 바람이 잦아들면 다시 .. 더보기